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푸른 숲


* "난 저애를 오늘 처음 만났다. 유정아, 저애랑 난 오늘 처음 만난 거야. 그게 다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너는 누구를 처음 만나서, 이제껏 무슨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여기서 이렇게 날 만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묻지는 않쟎니. 자기 입으로 그 얘기를 하면 그냥 듣는 거지. 나에게는 오늘 본 저애가 처음인 거다. 오늘의 저 아이가 내게는 저 아이의 전부야." 58p.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모의 말 속에는 언제나 깊숙한 데서 배어나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를 무장해제시키고야 마는 어떤 것, 아마도 그건 고모가 내게 보여주었던 사랑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안고 울었던 고모의 슬픔이었을까.
슬픔이 가면만 쓰지 않으면 그 속에는 언제나 어떤 신비스럽고 성스러우며 절실할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자기의 것이면서 가끔 타인의 잠겨진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나는 고모가 나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음을 느꼈다. 내가 죽였을까봐, 아니. 또다시 죽을고 할까봐. 고모는 그래서 요 며칠 동안 저녁과 아침마나 내게 전화했던 것이었다. 68p.

*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혹시 그건 내가 아니었을까. 그들을 나쁘다고 생각하고 먼저 싸움을 걸고, 그러니 그 원인을 제공한 건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기하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자매님 생각도 했지요. 저도 수녀님께서 처음에 맘대로 손을 잡으셨을 때 좀 놀랐거든요. 그 자매는 벌레 보듯 그 사형수를 본 게 아니라, 실은 그저 놀랐을지도 모르는 건데. 저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49p.

*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 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걸 놓치면 우리 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ㅇ낳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159p.

*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 뒤에는, 아이 때부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른 어른들이 있어요. 짜기라도 한 것같이, 모두 저래요.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그 폭력이 다시 폭력을 부르죠. 너 한번 혼 좀 나봐라, 하면, 그래 나는 정말 혼 좀 나봐야겠다, 결심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단언해요! 인류가 시작된 이래 폭력이 폭력을 종식시킨 적은 없는데, 정말 단 한번도 없는데..." 168p.

* 기사를 읽긴 했는데, 그건 당신을 만난 다음이었어요. 왜냐하면 엄마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달리 말하면 엄마의 정을 잘 모르고 자랐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어린 시절에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사랑을 받아야만 자라는 어떤 부분이 자라지 못한 채 우리 안 깊숙이 남아 있다는 거... 뭐랄까 다 크지 못한 미숙아의 흔적 같은 것이 얼굴 어딘가 남아 있어요... 저는 그것을 당신에게서 보았어요." 197p.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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