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집으로 이사 오던 날입니다. 유선방송과 인터넷 설치를 위해 기사님을 불렀더니 우선 창틀에 구멍을 뚫어도 되는지 주인에게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케이블 선이 방으로 들어오기 위한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마 전에 살던 분들이 TV를 연결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허락할 줄 알고 전화를 했는데 수화기를 든 아내의 낯빛이 좋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선처'를 구하는데 안 된다고 한 모양입니다. 대략 난감하고 화도 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겨울이 코앞인데 창문을 조금이긴 하지만 열어둬야 하고 그렇지 않으려면 TV와 인터넷을 포기해야 합니다.

마침 열쇠를 갖다 주러 이전에 살던 분이 들렀습니다. 사정 설명을 했더니 주인의 '완고함'에 대해 그제서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결론인즉은 대충 졸라서는 들어주질 않으니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라는 것입니다. 어지간히 졸라서는 집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도무지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는군요. 자기들도 좋게 해결하고 싶어서 참아왔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옆에 있던 처제가 '형부만 믿는다'며 은근히 한판 싸움?을 기대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면야...

그러다가 문득 이 집을 소개시켜준 부동산이 생각났습니다. 급박한 이사임에도 참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던 부동산 주인 아저씨가 생각나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복덕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완고한 분이라면 전화로 윽박질러봐야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어찌 어찌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한다고는 해도 최소 2년을 이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처음부터 관계가 꼬이면 두고 두고 피곤해질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부동산 주인 아저씨는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집주인이 이분에게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의 전화로 구멍 뚫는 문제는 물론이고 여타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도 가능해졌습니다. 잠깐이지만 많이 배웠다고 진심을 전하고 왔습니다. 작은 문제이지만 일이 풀려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적잖은 지혜를 배운 하루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해결 방식이 가장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인과 세입자간에는 분명히 서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게 마련인데 그에 대해서 주인은 무지했거나 무관심했거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게 분명했습니다. 이사 전에 기본적인 해결을 해주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설명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문제와 사람이 절반씩 얽혀 있는 구조입니다. 만약 문제만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이 비록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인간관계가 틀어져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구조로 바뀌어 버립니다. 주인과 직접 싸우는 것을 주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기획자로서 가져야 할 역량에 대해 이런 말을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전장에 나가는 무사는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무기를 바꿔들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모두 나 같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처한 상황이 저마다 틀리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나 일의 수행이 힘들어집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세워줄 수 있어야 하고, 외모를 중시 여기는 사람 앞에서는 갖춰 입어야 하며,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는 아픈 말을 피해가야 합니다. 만약 그런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앞설 수만 있다면 의외로 그 문제나 일은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꼭 이사나 회사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지혜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나 필요한 지혜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심과 실천이 어려울 따름입니다^^

p.s. 일이 안되는 경우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Human Lock과 구조와 프로세스가 문제가 되는 System Lock이 있다고 하네요.



* 제가 걸어온 길이 이렇게 평화로운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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