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세요?

습작 2008. 6. 18. 17:44

이혼서류를 떼러 가정법원에 다녀왔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걸으면 행정법원, 고등법원 등이 모여 있는 법원청사의 기다란 담장을 만나게 된다. 그 담장의 중간 어디쯤엔가 난 쪽문을 타고 들어가자 이혼을 생각하며 걸어갔을 많은 부부 혹은 남편, 아내들이 생각하기엔 다소 낭만적인 돌밭길이 보인다. 빗물이 고인 길 틈틈이 양쪽으로 우거진 수풀이 흔들거리며 뜻하지 않은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등법원과 함께 신관 건물을 쓰는 가정법원 1층에 들어서면 맨 먼저 은행창구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서야 흡사 구청 민원창구 같은 가정법원 창구가 나타났다. 평일 오후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순서,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이혼에 필요한 신청서 양식을 찾았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처럼 양식만을 따로 모아둔 테이블엔 얼핏 봐도 20여 종의 서류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혼에 관련된 서류 양식은 두어 바퀴를 돌았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구 옆에 앉아계신 시민 자원봉사자를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민망해서 웬만하면 직접 필요서류를 찾아 바로 나오고 싶었는데 별수가 없다.

"저... 이혼서류를 찾고 있는데요..."
"협의이혼이신가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시원스레 대답하는 자원봉사 아주머니는 서류를 꺼내 들며 내게 물었다.
이미 인터넷에서 기본적인 조사를 하고 갔기 때문에 재판이혼과 협의이혼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네..."
말꼬리를 흐리는 내게 '젊은 사람이 왜 벌써 이혼을 할까'하는 근심 어린 눈빛이 따라붙었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낚아채듯 서류를 집어들고 나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실제로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눈빛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최근 협의이혼 과정에 숙려기간이 법적인 의무사항으로 도입되고 양육의 책임에 관한 조건도 까다로워져서 이전보다는 이혼이 훨씬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긴 이전의 이혼절차를 보고 있노라면 '욱'하는 심정만으로도 충분히 쉽게 이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들을 동시에 느끼긴 또 얼마나 쉬운가를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떠난 후에는 어떤 법적인 유예조치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혼 과정은 수술실의 칼날처럼 차갑게 다가왔다. 뜨겁게 사랑하였지만, 그와 똑같은 강도로 차갑게 이혼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이혼율을 보자면 어쩌면 그 어려운 결정이 그렇게들 쉽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가다가도, 숱하게 겪어온 사람들과의 갈등을 생각해보건대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의 (풀지 못할) 갈등이라면 또 한 번 깊이 공감되기도 한다.

일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법원에 다녀왔고 이혼 서류도 떼어봤다.
머릿속에 무슨 프로그램처럼 이혼의 과정과 절차에 대한 지식도 적지 않게 쌓인 상태다.
그러나 이 일이 마무리 된다면 컴퓨터 포맷하듯이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다.
아직도 내게는 이혼이 '쿨'한 결정이기보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임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이혼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총 이혼건수는 12만4600건으로 12만5000건 가량이었던 2006년보다 400건(-0.4%) 감소했다. /뉴시스, 200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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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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