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
- 구본형, 나의 변화 이야기


‘노인과 바다’를 다시 꺼내 읽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언젠가 수학공부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와이프가 과외 하던 ‘수학정석’을 들춰 본 적이 있었고, 너무나 인상적인 블로그 글로 인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드커버판을 직접 서점에서 산 기억도 있었지만 그 때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래된, 하지만 그 당시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대상들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하지만 ‘노인과 바다’를 들춰본 건 그런 목적 때문이라기보다 만만하게 얇은 책의 분량과 애매하게 남은 서너 시간의 뜬 시간 때문이었다. 오히려 헤밍웨이가 등장한 커피 광고가 더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이가 서른 중반이 넘어 집어든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된 건 이 책의 결말만큼이나 큰 여백을 만드는 경험이었다. 분명히 이런 저런 이유로 서너 번을 읽고 영화까지 보았지만 끔찍하다 싶을 정도의 공허함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그 때의 기억에 비해 확실히 지금 이 소설을 받아들이는 나의 의식세계는 달라져 있었다. 소설 속의 노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노인처럼 사자의 꿈을 꿀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애틋한 소년의 우정이 노인에게는 사진 한 장으로 남았던 부인의 존재보다 더욱 친밀하게 느껴진 것도 그렇거니와, 뼈만 앙상하게 남아 돈 한 푼 되지 않는 전설이 되어버린 그 처절한 삶의 투쟁의 기록이 절절히 와 닿게 된 건 ‘작은’ 깨달음이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숙했다’는 긍정의 의미도 있지만 ‘나이듦’의 숨길 수 없는 증거이기도 했다.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가볍진 않더라도 조금은 더 익숙해진 것이다.

아줌마들의 하소연은 숱하게 들어온 것 같지만 정작 아저씨들의 자발적인 고백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저씨는 언제나 삶의 조연이다. 자신의 삶과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아줌마들의 이야기에 언제나 묻혀버린다. 문제의 발원지, 해결의 대상, 더 깊은 관심에 대한 끝없는 요구로써 ‘아저씨’들은 해석된다. 여자들의 바람은 웬지 조금 더 낭만적으로 보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도 아저씨들의 바람은 그저 음습한 본능적 욕구로 더 많이 읽히는 것 같다. 두둔하자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저씨들은 언제나 초라하다. 벗겨진 머리, 기름진 얼굴, 보기 흉하게 삐져 나온 배, 짝달막한 양복 바지, 하다 못해 일본만 가더라도 기장을 맞춰 입은 아저씨들이 멋지다는 여직원에 고백 속에는 초라한 이 시대의 ‘아저씨’의 이미지가 묻어나온다. 그들이 능력이 있다면 기러기 아빠로 남아 홀로 빈 집을 지키고, 무능할 경우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어 거리로 나앉아 버린다.

언젠가 와이프가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양육의 어려움으로 EBS 프로에 나간 적이 있다. 나는 아내의 어려움을 있는 힘껏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촬영에 동의했고 휴일과 평일의 저녁 시간을 고스란히 투자하여 아내의 촬영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방송되기 두어주 전, 동일한 프로그램을 보고 그냥 얼어버렸다. 그 프로에는 한 없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이 시종일관 우울한 얼굴로 아내의 눈물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었다. 프로를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출연중인 아내의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방송내용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해 보였다. 나는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아내가 출연하게 된 내용은 나랑은 무관해 보였지만 그래도 아내의 문제, 가정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남편의 존재감과 떼어서 설명할 수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하다는 추가촬영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렸고 문제 해결을 위한 그 프로그램의 출연히 또 하나의 다른 문제를 낳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생의 황금기를 이미 놓쳐버린, 새로운 꿈의 실현보다는 현실의 끈을 붙잡고 있기에도 버거운 존재가 이 시대의 ‘아저씨’이지 ‘아버지’이다. 회사에서는 탁월한 성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기대와 아이들의 필요에 쉼없이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성공적이지 못했을 때의 경우의 수를 너무도 잘 알기에 내키지 않는 헌신을 스스로 강요하지만 그들의 삶은 언제나 여전히 버거워보인다. 남자들의 출근 가방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들의 웃음은 공허한 정신세계의 반증이기도 하다. 유일한 기쁨의 원천인 담배와 술도 그들의 건강과 존경심을 소리없이 조금씩 갉아먹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한다. 좀 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해 주지 못해서 생긴 미안함이 그들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투덜거리며 문을 열어주지만 존재 자체 만으로도 서로 감사할 수 있는 아내의 자리, 대낮의 태양보다 몇 백만배는 환한 웃음으로 하루의 피곤함을 거짓말처럼 씻어 주는 아이들, 삶의 고단함이 완숙미가 되어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줄 수 있을 때 그들은 행복하다. 한번도 만만해보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주저 앉지 않았던 일의 성취가 주는 쾌감도 결코 양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은 넓혀 주었다.

그들은 가끔씩 죽음을 마주 대한다. 그들의 동료와 친구의 아버지, 혹은 조금 이른 지인의 죽음을 검은 옷을 입고 종종 맞아야 한다. 영안실 입구의 왁자지껄함이 이제 더는 싫지 않은 이유도 그렇거니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당신을 이해할 있겠노라’고 고백할 때는 눈물도 난다. 이제 나의 존재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존재감을 위해서 살아야함을 깨닫고, 비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산뜻한 스타일의 흔적을 찾아보지 못할 지라도 당당한 변명 하나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로 불리게 된다는 건 돌아가지 못할 삶의 계곡 하나를 건너버린 것이다. 아줌마처럼 소리 내어 울지도, 웃지도, 수다를 떨지도 못하지만 그들도 하나의 동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 주위를 둘러보며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기에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좀 더 젊은 친구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잠언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제 뒤돌아보기 보다는 새로이 앞에 놓여진 전혀 다른 산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뒤에서는 아내와 아이들, 친구와 동료들이 바라보고 있으니 두려운 척도 어려운 척도 해서는 안된다. 아저씨가 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저씨로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아줌마 됨의 두려움을 말하는 ‘줌마포비아’가 실존의 문제라면 ‘엉클포비아’는 책임감의 문제다. 한 사람의 남편, 아이들의 아버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또한 기꺼이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의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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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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