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워서였다.
2년 꼬박 아이폰 3GS를 썼다.
추호도 의심없이 아이폰5로 옮겨가리라 믿었다.
그러다 우연히 옵티머스 뷰2를 만났을 때 문득 그런 ‘자각’이 일었다.
스티브 잡스도 세상을 떠난 마당에
길어지고 빨리진 것 말고는 도무지 달라진 게 없을 것 같은 아이폰5로 왜 갈아타야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딱 2달이었다.
5인치의 화면, 안드로이드폰의 생경함이 신선함으로 작동하기까지는.
이유야 많다.
출근길과 퇴근길, 5인치의 화면에 커버까지 여닫는 과정이 몹시도 걸리적거렸다.
굳이 볼륨을 모두 줄여야 진동으로 바뀐다거나,
살짝만 눌러도 작동하는 버튼에다 메뉴 버튼까지 피하느라 손에 걷돌기 일쑤인 점,
뭔가 2% 부족한 아이콘과 UI의 어설픔이 무뎌지기는 커녕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2달이 지났을 때 폰을 갈아탈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고,
나는 미련없이 안드로이드를 버리고 좁고 길쭉한 아이폰5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이폰으로 돌아온 이유를 단 한 가지로 말해야만 한다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도 어렵지 않다.
솔직히 앞의 이유들은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다.
아이폰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아이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폰이 아름답다니...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전제를 달고도 멋쩍은 이유다.
전화를 하고,
웹서핑을 하고,
은행일을 보고,
또 그 외에 몇 가지의 앱들을 쓰고...
그런데 폰이 아름답다니.
아름다워서 쓰고 있다니.
그런데 사실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알루미늄의 테두리 마감과
차가운 질감을 즐기기 위해
케이스를 몇 개를 샀다가 벗기고,
필름을 몇 번을 씌웠다가 떼내버리는 모양새가 그렇다.
그 증거다.
그런데 이유는 정말 그것 뿐인가?

시보레는 차 이름이 아니다.
하일권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졸업 작품을 장편으로 연재한
‘3단 변신 김창남’이라는 웹툰의 주인공 이름이다.
좀 더 정확히는 로봇의 이름이다.

이 웹툰은 뭐랄까...
식상한 소재와 식상한 주제의 조합물에 가깝다.
학원물에 왕따,
성긴 구성에 SF 흉내를 낸 어설픈 퓨전음식 같달까?
하지만 대단한 흡입력이 있고,
생뚱맞지만 지리함으로 늘어지지 않는 오버스러운 유머가
이제 그만 봐야지 할 때쯤 감칠맛을 낸다.
그러다 서서히 몰입으로 이끌고 끝내는 마음 속 작은 오열을 끌어내고 만다.
아...
이건 뭐지?


로봇이 있다.
이 로봇은 여학생의 외모를 그대로 재현해냈을 뿐
말투도 동작도 기계적이다.
다만 아주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인격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 점이 포인트다.
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이 왕따로 고통받는 한 소년의 설익은 감정이 쉴 자리를 만들어준다.
계산치 않고,
거짓이 없으며,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 작동하자
작은 변화들이 일기 시작한다.
그 끝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아이폰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었다.
이 둘을 서로 떼어놓고 말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3단 합체 김창남’이라는 웹툰을 보면서
웬지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어쩌면 스티브 잡스가 만든 건 전화기도 스마트폰도 아닌,
시보레 같은 로봇이 아닌가 하는,
외롭고 힘들 때 꺼내어 쓰다듬을 수 있는,
기계적이긴 해도 가끔씩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시보레와 시리...
뭔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브랜드를 구성한 기본적인 조건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실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능적인 편익’이 있는가 하면
그런 유용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서적인 편익’도 있다.
이 정서적인 편익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영향력 만큼은 막강하다.
소비자들은 해당 제품을 쓰거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들었던 친밀감과 소속감을 누릴 수 있으니까.
이는 모든 브랜드들이 다다르기 원하는 궁극의 경지다.
이 단계에 이른 브랜드는 마케팅도 프로모션도 필요없다.
기능적인 불편함도 유니크한 개성이 된다.
심지어 창업자가 죽고 주인이 바뀌어도 브랜드는 영속한다.
이른바 영생하는 브랜드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웹툰 ‘3단 합체 김창남’의 제목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로봇 시보레는 친구 자전거 이름에서, 로봇 번호는 군번에서 따왔다고 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이 ‘호구’이다.
약간의 상상, 혹은 해석의 여지도 없는 직설적이고 무성의한 이름,
하지만 의도치 않게 던져진 메시지는 묵직하다.
왜 우리는 사람이 아닌 로봇의 인격에 감동하게 된 걸까.
만화 속 현실은 사실 과장이랄 것도 없는 그야말로 현실이다.
그 속에서 아주 기본적인 인격,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발견한다.
이 만화에 마음이 움직인 학생들이라면,
사람들이라면,
그런 기본적인 인력,
그러니까 진정성에 목마른 것이다.

얘기를 맺자.
삼류 웹툰에 마음이 울컥했다는 사실을 떠벌리는 것도 개운치 않지만
웬만한 소설이 주는 감동 못지 않다는 고백 또한 사실이니까.
말하고 싶은 건 한 가지다.
우리에겐 점점 더 깊어지는 결핍의 우물이 있다.
그건 아주 작은 격려,
혹은 관심,
그리고 희망일지 모른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선뜻 하지 않는 손 내밀기,
자신이 피해자나 루저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맛설 수 있는 적지 않은 용기.

어쩌면 스티브 잡스는
한 손에 꼬옥 감기는
그런 로봇 하나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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