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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2 십자군 탄크레디 452
  2. 2011.08.18 가야금을 사랑한 미국인, 조세린 462
  3. 2011.08.18 진심으로 즐기기 원한다면, 2NE1 인터뷰 중에서 474
  4. 2011.08.17 내려놓음 475
  5. 2011.08.08 마이 코리안 델리 487

십자군 탄크레디

책읽기 2011. 8. 22. 23:39


탄크레디는 서른여섯 살에 죽었다. 이 시대에는 결코 너무 이른 죽음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상의 탄크레디는 이상하게도 젊음의 상징처럼 간주되어 왔다.
...지금도 유럽인들, 특히 남유럽 사람들은 탄크레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신의가 두텁고 생기 넘치는, 영원한 젊은이를 떠올린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엄청난 카피로 시작되는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그러나 정작 내게는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집중해서 읽지 못한 탓일까 고민을 해봤지만 뾰족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은 그들의 그 장대한 전투, 혹은 살육의 여정을 가능케한 이유가 너무나도 '세속적'이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은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탄크레디. 그의 이름이 그토록 오래도록, 그리고 명예롭게 기억되는 이유를 되짚어볼 만하다. 이름을 남기기 위한 삶이 아닌, 자기다움으로 충만했던 한 사람의 삶이 남긴 훈장같은 이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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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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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말뿐인 칭찬을 넘어 때로는 독설을 아끼지 않는(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조세린 교수 역시 비슷한 경우다. 한국인도 살아 생전 직접 연주해보기 힘든 가야금 때문에 한국에 왔고 20년 째 가야금을 연주하고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통해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을 때 비로소 '진실'을 전해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외국이랑 비교하는 것 좋아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열등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거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최근 인터뷰 때문에 10여 명의 인문학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들었던 의문은 '과연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중국, 일본과 같은 인접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부분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에 적지 않은 열등감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열등감은 자연스럽게 강대국에 대한 맹목적인 문화적 사대주의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조세린 교수가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점은 쉽게 발견된다.

“제가 한국에서 가야금 명인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기회가 잘 안 생겼어요. 진짜 만나고 싶은데, ‘안 된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 또래의 피아노 전공자인데, 한국 음악에 관심이 있어 한국 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하버드에서 왔다’고 하니까 기회가 탁탁 열리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고 너무 화가 나서 ‘나도 하버드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프로필을 먼저 확인하고 '하버드 출신이 우리 가야금을?'하는 생각과 함께 기사를 읽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다. 우리나라의 유수한 전문가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하버드'란 이름이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한 도구의 하나에 불과했다니. 이러한 당찬 모습은 가야금을 배우는 이유, 과정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내가 도대체 한국에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그러다 그냥 ‘좋아할 때까지 하자’고 마음먹었죠. 결국 가야금을 좋아해서 가야금에 빠졌어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좋아할 때까지 하자'
이 말은 아무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조금만 길이 막혀도 그 길을 피해가기 위한 변명부터 먼저 생각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세린 교수의 설명이 더 인상깊다.

“쉽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오래 안 가잖아요. ‘내가 이해를 못 하니까 좋은 줄 모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더 노력해 보자’ 이런 생각이었죠.


맞는 말이다. 쉽게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쉽게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노벨상을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분야를 가장 먼저 연구했는가'의 여부라고 한다. 즉 아무리 대단한 발견 혹은 발명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초'가 아니면 노벨상을 타기 힘들다는 얘기다. 어떤 서양인이 이처럼 애정을 가지고 '가야금'을 사랑하고 연주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가치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마음을 움직였던 건 보일듯 말듯한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다. 이외수씨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통해 대상에 대한 애정이 감동을 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가야금에 대한 관심이 한국인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조세린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의 말이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맹목적인 애국심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누군가 따진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이다.

“내 역할은 한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나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한국인들은 한국을 싫어해요.”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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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E1은 '얼굴 안보기'로 유명한 YG 패밀리가 만든 여성 아이돌 그룹이다...라고 쓰고 보니 은연 중에 들어간 설명조의 글 때문에 내 나이를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21세기에 'TV란 무엇이다'라는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아무튼 개성과 실력, 거기에다 위트 넘치는 이름까지 매력적이어서 신곡이 나오면 한 번은 듣곤 하는 2NE1의 인터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그들은 다른 아이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그들은 음악을 무엇이라 말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나름의 색깔을 지켜가고 있을까?

- 앨범에 일렉트로닉부터 록, 어쿠스틱 팝까지 다양한 색깔이 들어 있어요. 앨범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요?
“한곡씩 내놓을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우린 한가지 장르만 하는 그룹이 아니거든요. 투애니원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일관성 아닐까요?”

 
말의 성찬일까? '투애니원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일관성이라니. 아무튼 대단한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로 자신의 색깔을 만들고 지켜왔던 선배 가수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의문이다. 하지만 '나가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김범수와 박정현이 '발라드'를 불러서가 아닌 그들 자신만의 음악을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체성'의 자각인 셈인데 씨엘의 다음 인터뷰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었다.
 

“곡을 직접 쓰고 싶진 않아요. 그러다 보면 저만의 색깔이 생겨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 테죠. 다른 누군가의 곡을 잘 소화해내며 표현의 한계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요즘의 아이들 그룹 중에는 비주얼을 넘어 가창력과 작곡 능력까지 겸비하고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가수의 신정수 PD가 '씨스타'의 효린을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는 소식은 단순히 시청율을 의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표현의 한계에서 '영원히' 자유롭고 싶다니... 이건 재기발랄의 수준을 넘어서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의도되고 연출된 인터뷰일 뿐인가? 하지만 말은 그 사람을 숨길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진정성'이 중요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말에 얼마나 그들의 삶을 담고 있을까?

- 무대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무대를 즐기려면 그 전에 죽도록 연습해야 해요. 눈 감고도 춤출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즐길 수 있거든요.”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죽도록 연습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아이돌 그룹의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생 생활'은 이미 대중에게도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돈을 벌고 싶어하는 기획사와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10대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본주의적 화학 작용 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이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을 담보로 무대 위의 삶이 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 않나. 넥타이 매고 통근 버스를 전전하면서 그나마 이 사회의 건강한 대들보 역할 비슷한 것 정도는 하고 있다고 믿는 나, 과연 그들만큼 이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나?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죽도록 연습한다'는 그들의 말이 내 속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닳을대로 닳은 곰팡이내나는 연륜으로 무장한 이 사회의 지도층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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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책읽기 2011. 8. 17. 20:56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크리스천일 뿐이지 한번도 요란한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소리쳐 기도해 본 적도 별로 없고 병고침보다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 더 바른 신앙이라 믿고 있으며 길거리에서 강요하듯 전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불쾌감이나 머쓱함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싶다. 남에게 손벌리지 않는 평범한 수준의 부와 아울러 남을 도울 수 있거나 조금 너른 집과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욕심도 갖고 있다. 이왕이면 성공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내게도 하나님께도 유익한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진 않지만 정직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성공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런 나의 생각과 꼭같은 김동호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를 새겨 읽기도 했다.

그러나 이분, 그러한 생각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왔다는 사실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과연 내가 가진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산에서 도를 닦는 수도자의 삶같은 것일까? 하버드대학을 나오신 분이 왜 몽골이라는 먼 나라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바라는 전형적인, 그리고 올바른 순종의 모습일까? 그동안 어렴풋이 가져왔던 신앙과 세상의 삶 사이에 커다란 계곡이 생겨난 듯이, 그리고 그 계곡으로 폭포수같은 고민의 물길이 덮친 듯이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 문제와 고민에 대한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고민은 팔복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도 동일하게 품었던 것이자 질문이었다. 그러나 최춘선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하진 않았다. '사명은 각자각자요...'라는 말이 그래서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분이 아님을 알았어요. 내가 그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지요."

그런 내게 책 가운데 나온 이 대화가 내 생각의 물꼬를 터놓았다. 사실 하나님의 우리더러 이용규선교사님처럼 살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다. 즉 하버드까지 갔다가 몽골로 가라는 그런 구체적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곧잘 넘겨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생업이나 학업을 팽개치고 지금 당장 선교를 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실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은 선교사님을 크게 쓰시기 위해서 본인이 가장 내려놓기 힘든 부분에 대한 순종을 요구했고 선교사님은 그것에 기쁨으로 순종했다. 그러나 우리 각자 각자에게는 순종할 영역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이 내게 권고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고민해보기로 했다.

일단은 나의 달란트와 나의 욕심을 구분해보기로 했다. 하나님은 나의 달란트가 선하게 쓰이고 열매맺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욕심이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용규 선교사님을 하버드의 유명한 교수로 부르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님의 경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 둘의 차이가 우리에겐 크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 나는 그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우리 시대에 행복이 주인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한다. 이때 행복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려는 열망과 행복해질 권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나 그 행복이 단순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목적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세상이 가르치는 지혜는 대부분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은 하나님께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유익하지가 않다. 진정한 행복은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며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며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란 그분이 태초에 나를 설계하는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용규 선교사님 메시지는 고속도로에 난 표지판과 같다. 마구잡이로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질주하는 우리에게 조금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둘러 보라고, 그리고 이 길의 끝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낮지만 강하게 속삭여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또 들어보고 있다. 수많은 차들이 고속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진정으로 그들이 답을 찾기를 원한다. 이 책속에서 그리고 성경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시 한번 곰곰히 곱씹어본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면 일단 나의 욕심과 분주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쉽지 않지만 꼭 해야만 하는 그런 '내려놓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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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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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이 책을 소개하고 다녔지만 반응은 별로였다. 적어도 회사 안에서는 말이다(사람들이 유머가 없어!!!). 아무튼 좀처럼 '흥이 난'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아내는 달랐던 것 같다. 아직 한두 시간은 읽을만한 분량을 책날개로 표시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이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씻기는 손에 나와 같은 흥을 담아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재밌다'고 말한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이라는 사족을 달긴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을 막 다 읽었다. 그리고선 생뚱맞게도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 흥미있어 하는 기준 중의 하나가 '충돌'임을 새삼 깨닫는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 '충돌' 때문이다. 전쟁 3부작과 로마인이야기 2부 '한니발 이야기'가 읽은 책의 전부이긴 하지만 그녀의 출중한, 생생한 글쓰기 능력만큼이나 그 소재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 두 문화의 충돌, 바로 그것이다.

'마이 코리안 델리'는 그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과 비슷한 감흥을 준다. 그 무슨 어거지냐며(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광팬이라면)따질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 이주민의 새로운 역사를 썼던 한국인 장모와 함께 델리를 운영했던 이야기를 그야말로 미주알 고주알 써내려가는 '샌님(아내의 표현대로라면)'의 충돌은 가부장적인 문화가 흔적이 아닌 현실로 만난 청교도 출신의 글쟁이 사위의 푸념과 호소와 애정어린 고자질이 눈 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문학과 사람, 어쩌면 뉴요커의 삶 자체를 사랑한 듯 보이는 조지와 가게 점원 드웨인, 그리고 그 주변의 이야기는 생생하다 못해 눈물겹다. 그래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명언, 혹은 격언을 기어이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글 비슷한 것을 써서 먹고 사는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단 한 가지다. 글을 재밌어야 한다는 것, 심장의 박동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는 것, 그리고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임을 읽는 독자들에게 환기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주말 아들이 읽던 로알드 달의 소설(우리의 챔피언 대니)을 펼쳐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아홉살 짜리가 일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서너 시간을 숨도 안 쉬고 책을 읽게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포스트로 올릴까 한다).

아무튼 책장을 막 덮는 순간, 아내에게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팬티 바람으로 편집실을 서성이던, 저자가 오픈한 델리의 점원으로 일해보기를 진심으로 흥분해마지 않으며 바랬던 '파리 리뷰'의 편집장이자 보스였던 조지가 어느 날 아침 심장 마비로 일어나지 못했으며, 하이네켄 12개를 매일 마시며 작가의 유일한 친구로 표지 모델을 장식했던 드웨인 역시 동맥류로 짧았던 이 생의 마지막을 장식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400여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이 책의 촘촘한 활자 속에서, 넘을 듯 말 듯 넘실대던 웃음과 울음, 희극과 비극의 교차점 사이에서의 아쉬운 여행을 마무리하며 오랫만에 서평 하나를 끝까지 써본다.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코리안 델리의 소박함, 절박함, 간절함과 다른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자문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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