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일하는 회사는 ‘브랜드 전문지’를 만드는 회사다. 격월로 브랜드에 관한 매거북(잡지가 아닌 단행본, 더 정확하게는 중간 형태의)을 발행하며 그 명성을 바탕으로 ‘컨설팅’을 한다. 이 책의 나이는 6살, 내가 입사한 지는 5년 차에 접어든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미 이 전문지의 탄생 전에 약 7년 간 컨설팅의 경험을 쌓은 분이다. 이름도 없는 지방 기업에서 런칭한 브랜드를 수천 억 짜리 브랜드로 키웠을 만큼 능력 있으신 분이다.

문제는 나다. 언젠가 각계 전문가들이 모인 스터디 모임에서 ‘브랜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횡설수설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가 ‘브랜드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올 때면 진땀이 난다. 하지만 더 겁나는 질문은 따로 있다. 바로 ‘그렇게 브랜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당신은 과연 일상 생활 속에서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는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단 하나의 대형 마트만 있다. 시장도 없고 경쟁 마트도 없고 이렇다할 가게들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번 돈의 삼분지 일 정도는 고스란히 마트에 갖다 바치는 셈이다. 그래서 대개는 이 마트에서 잘 알려진 상표를 찾아 가격 대비 성능이나 효능이 확인된 제품들을 구매할 뿐이다. 어쩌다 1+1이나 특별 할인 상품을 고르면 로또를 맞은 기분이 드는걸 어쩔 수 없다.

흠...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브랜드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대신할 수 있으며, 좋은 브랜드를 발굴하고 이들을 도움으로써 브랜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회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하고 쓴 대로 살고 있지 못한 셈이다. 과연 나에게 브랜드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의 기준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 생태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얼마 전 네이버에 윤광준 씨의 글이 올라왔다. 생활 속 명품을 다룬 ‘윤광준의 생활명품’이란 책의 일부를 옮겨 싣고 있었다. 가격에 매이지 않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글솜씨에 매료되었던 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라온 덧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환호가 아니었다. 욕설에 가까운 비아냥거림이 즐비했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저자를 물건을 물신화하며 사치와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를 감동시켰던 글들이, 좋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을 가르쳐주었던 글들이 길거리의 빈 콜라병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 덧글들이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거였다.

“명품을 쓴다고 해서 쓰는 사람의 품격이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싯가 85만원 짜리 파버 카스텔에 관해 쓴 이 글에 달린 덧글의 일부다. 덧글을 단 이는 1,000원짜리 연필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며 값싼 제품을 쓰는 사람이라 해서 품격이나 안목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윤광준씨가 쓴 글 역시 나름의 의도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상품을 단순히 그것이 가진 원래의 효용과 용도로만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건을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을 글로 남겼을 뿐이다. 그에게는 수 천만원짜리 오디오이든 1,000원짜리 막걸리이든 그것이 가진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면 모두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물건이 인간 정신이 물건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그에게 파버 카스텔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연필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체험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해없기를...
적어도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4년 넘게 일하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의 물건으로 교감까지 나눌만큼의 내공은 쌓지 못했다. 물론 애플과 스타벅스와 같은 예외는 있다(이들이 단순한 스마트폰, 혹은 커피숍 이상의 그 무엇임을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두 가지만 넘어서면 아뜩해진다. 과연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상용품들을 단순한 소모품 이상의 브랜드로 인식하고 소비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덧글들에도 할 말은 있다. 300원짜리 모나미로도 충분하다고 목소리 높이는 덧글의 주인공이 2,30대의 직장 여성이라면 과연 가격 대비 성능만으로 가방을 고르고 있을까? 그가 만일 고등학생이라면 노스 페이스가 아닌 국산 오리털 파카만을 입는 친구일까? 모를 일이다. 과연 그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실용과 합리성에 기반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만약 덧글을 단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이들이니 나이를 막론하고  존경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끌린다. 브랜드를 단순히 사치와 허영, 물신화의 결과로만 매도하기에는 그것이 가진 매력이 너무 선명하다. 실제로 그것은 핸드폰 시장을 커피 시장을 송두리채 바꿔놓지 않았는가. 그 많던 다방들이 사라지고 스타벅스는 커피숍이라는 새로운 문화 생활의 진앙지가 되었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수천 만대가 팔리던 핸드폰들이 피처폰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낸 암호의 해독을 위해 6년에 걸쳐 26권의 책을 만들었고 적어도 브랜드에 관한 최초의 전문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브랜드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브랜드가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형이상학적인 수사의 뒤에 숨어 그것에 대한 정의를 회피해선 안된다.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체험해보고 오감으로 그것의 실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주는 가치를 모두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가장 큰 명분이니까). 그래서 브랜드를 특정 마니아나 학자 혹은 전문가의 영역에서 나같이 막눈을 가진 보통 아저씨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해보고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3.

문제는 대상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즐비한 1회성 소비재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명품까지 모두 경험해보고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제품들이 ‘브랜드는 이것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돈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우리가 브랜드라 부르는 많은 제품들이 성능 대비 가격대가 비싼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브랜드이면서 손쉽게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제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때 문득 연필이 떠올랐다. 파버 카스텔에 윤광준씨가 소개한 85만원 짜리 그라폰 모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카스텔 9000의 가격은 단돈 1,000원이다.

게다가 나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연필 끝의 촉감, 키보드의 키감, 만년필의 사각거림을 따져 쓸만큼 보통 사람보다 쓰는 경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를 옮겨 쓰고 틈만 나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교보문고의 핫트랙스를 찾아 다양한 종류의 연필을 구입했다. 한 번도 연필을 브랜드로 구매해본 경험이 없는터라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다양한 사전 정보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이드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연필들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과연 브랜드라 불리우는 연필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 우리가 굳이 그것을 구분해가면서 써야할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격 대비 성능으로만 따질 수 없는, 그래서 많게는 몇 배의 가격 차이를 만들어내는 브랜드의 핵심적인 가치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이야기는 그 차이를 다양한 상품을 통해 발견해가는 1년 간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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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말뿐인 칭찬을 넘어 때로는 독설을 아끼지 않는(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조세린 교수 역시 비슷한 경우다. 한국인도 살아 생전 직접 연주해보기 힘든 가야금 때문에 한국에 왔고 20년 째 가야금을 연주하고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통해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을 때 비로소 '진실'을 전해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외국이랑 비교하는 것 좋아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열등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거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최근 인터뷰 때문에 10여 명의 인문학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들었던 의문은 '과연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중국, 일본과 같은 인접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부분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에 적지 않은 열등감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열등감은 자연스럽게 강대국에 대한 맹목적인 문화적 사대주의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조세린 교수가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점은 쉽게 발견된다.

“제가 한국에서 가야금 명인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기회가 잘 안 생겼어요. 진짜 만나고 싶은데, ‘안 된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 또래의 피아노 전공자인데, 한국 음악에 관심이 있어 한국 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하버드에서 왔다’고 하니까 기회가 탁탁 열리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고 너무 화가 나서 ‘나도 하버드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프로필을 먼저 확인하고 '하버드 출신이 우리 가야금을?'하는 생각과 함께 기사를 읽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다. 우리나라의 유수한 전문가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하버드'란 이름이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한 도구의 하나에 불과했다니. 이러한 당찬 모습은 가야금을 배우는 이유, 과정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내가 도대체 한국에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그러다 그냥 ‘좋아할 때까지 하자’고 마음먹었죠. 결국 가야금을 좋아해서 가야금에 빠졌어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좋아할 때까지 하자'
이 말은 아무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조금만 길이 막혀도 그 길을 피해가기 위한 변명부터 먼저 생각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세린 교수의 설명이 더 인상깊다.

“쉽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오래 안 가잖아요. ‘내가 이해를 못 하니까 좋은 줄 모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더 노력해 보자’ 이런 생각이었죠.


맞는 말이다. 쉽게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쉽게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노벨상을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분야를 가장 먼저 연구했는가'의 여부라고 한다. 즉 아무리 대단한 발견 혹은 발명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초'가 아니면 노벨상을 타기 힘들다는 얘기다. 어떤 서양인이 이처럼 애정을 가지고 '가야금'을 사랑하고 연주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가치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마음을 움직였던 건 보일듯 말듯한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다. 이외수씨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통해 대상에 대한 애정이 감동을 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가야금에 대한 관심이 한국인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조세린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의 말이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맹목적인 애국심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누군가 따진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이다.

“내 역할은 한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나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한국인들은 한국을 싫어해요.”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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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E1은 '얼굴 안보기'로 유명한 YG 패밀리가 만든 여성 아이돌 그룹이다...라고 쓰고 보니 은연 중에 들어간 설명조의 글 때문에 내 나이를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21세기에 'TV란 무엇이다'라는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아무튼 개성과 실력, 거기에다 위트 넘치는 이름까지 매력적이어서 신곡이 나오면 한 번은 듣곤 하는 2NE1의 인터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그들은 다른 아이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그들은 음악을 무엇이라 말할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나름의 색깔을 지켜가고 있을까?

- 앨범에 일렉트로닉부터 록, 어쿠스틱 팝까지 다양한 색깔이 들어 있어요. 앨범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요?
“한곡씩 내놓을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우린 한가지 장르만 하는 그룹이 아니거든요. 투애니원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일관성 아닐까요?”

 
말의 성찬일까? '투애니원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일관성이라니. 아무튼 대단한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로 자신의 색깔을 만들고 지켜왔던 선배 가수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의문이다. 하지만 '나가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김범수와 박정현이 '발라드'를 불러서가 아닌 그들 자신만의 음악을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체성'의 자각인 셈인데 씨엘의 다음 인터뷰 내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었다.
 

“곡을 직접 쓰고 싶진 않아요. 그러다 보면 저만의 색깔이 생겨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 테죠. 다른 누군가의 곡을 잘 소화해내며 표현의 한계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요즘의 아이들 그룹 중에는 비주얼을 넘어 가창력과 작곡 능력까지 겸비하고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가수의 신정수 PD가 '씨스타'의 효린을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는 소식은 단순히 시청율을 의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표현의 한계에서 '영원히' 자유롭고 싶다니... 이건 재기발랄의 수준을 넘어서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의도되고 연출된 인터뷰일 뿐인가? 하지만 말은 그 사람을 숨길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진정성'이 중요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말에 얼마나 그들의 삶을 담고 있을까?

- 무대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무대를 즐기려면 그 전에 죽도록 연습해야 해요. 눈 감고도 춤출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즐길 수 있거든요.”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죽도록 연습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아이돌 그룹의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생 생활'은 이미 대중에게도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돈을 벌고 싶어하는 기획사와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10대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본주의적 화학 작용 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이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을 담보로 무대 위의 삶이 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 않나. 넥타이 매고 통근 버스를 전전하면서 그나마 이 사회의 건강한 대들보 역할 비슷한 것 정도는 하고 있다고 믿는 나, 과연 그들만큼 이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나?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죽도록 연습한다'는 그들의 말이 내 속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닳을대로 닳은 곰팡이내나는 연륜으로 무장한 이 사회의 지도층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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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들고 컴백하던 날, 소녀시대는 정규 2집 앨범 'Oh!'를 출시했고 선주문만 15만장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전의 앨범들을 넘어서는 대단한 출발이다. 바야흐로 YG와 JYP, 그리고 SM의 아이돌 삼국지가 펼쳐지는 혼돈?의 시대에 다시 한번 '소시'의 존재감을 확인한 런칭이 아닌가 싶다.

'Oh!'의 티저, 음원, 뮤직 비디오, 앨범이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산했는지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다. 이미 5년에서 10년 가까이 '준비된' 아이들이 아이돌이 된 셈이니 이 정도의 프로세스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기하다. 삼십대 후반의 필자 조차도 그들이 9명이며 태연, 티파니, 윤아, 유리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중의 몇은 존재감이 없다는 사실까지도 꿰고 있다는 사실이. 별스럽게 챙겨볼 정도의 팬이랄 것도 없고 인터넷 신문의 헤드라인 정도만 읽을 뿐인 평범한 직장인에게도 자신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 그들의 마케팅이, 그리고 브랜딩이.

한 마디로 얘기해서 '소시'는 판타지다. 10대들에게는 되고 싶은 우상이요, 20대들에게는 잡을 수 없는 꿈이며, 30대들에게는 가질 수 없는 (그러나 숨기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게 각각의 마음 속에 가려져 있던, 숨어 있던 욕망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시대의 아이콘이 아이돌이고, 그래서 그들의 노래가 , 춤이 지금과 같은 위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이제 읽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현대인들을 읽지 않을 뿐더러 단순히 '듣지 않는다'. 뮤직 비디오 없는 아이돌의 음악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아이돌의 음악은 단순한 청각적 자극에 머무르지 않고 시각적인 충격과 온, 오프라인을 망라하는 체험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돌의 팬들은 옛날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흉내내고 찾아다니고 때로는 그들을 능가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감으로' 듣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강력하고 중독성 있어서 보고 듣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그들의 음악과 춤에 매몰되어버릴 정도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여백이 없고 휘발성도 강하다.

'디지털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이 있다. 디지털 기기처럼 우리의 기억을 대신해주는 기기와 미디어들이 늘어나면서 정작 우리의 기억력은 퇴화해버려서 이전 같으면 2,30여개는 외웠을 전화번호를 지금은 단축번호 정도로만 외우고 있다. 어쩌면 아이돌의 음악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시각과 청각의 비주얼와 비트로 끄집어내어버려서 정작 우리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아이돌의 음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한계를 말한다면 그건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이리라. 모든 것을,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이것은 과연 우리에게 득일까? 독일까?


잠시 비틀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 비틀즈가 해체되고 존 레논이 비명에 간 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언제나 최고의 팝송으로 꼽히는 곡은 언제나 그들의 곡 'yesterday'다.  'yesterday'는 전설이다. 음악이 아니라 역사이고 가수가 아니라 영웅들이다. 앞으로 100년의 시간이 흐른데도 그 사실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노래에는 수 많은 스토리와 역사가 담겨 있고, 그 곡을 듣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을 통해 또 다시 확대 재생산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를 들었던 어느 날의 추억, 그들이 남긴 이야기, 가사의 의미, 기타의 선율, 팝송의 역사, 멤버들의 개인사, 라디오의 사연들, LP와 CD를 넘어 음원까지 이르는 어마어마한 판매량... 그저 전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백만 번을 들어도 여전한, 새로운 감동을 주는 그들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의 감정과 형언할 수 없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때 유행하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상표'가 아닌 오래도록 기억되는 '브랜드'들처럼.

사람은 영생을 꿈꾸고 브랜드는 불명을 꿈꾼다. 사람과 브랜드가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브랜드의 욕망이 사람의 그것처럼 무제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욕망을 다룬다 해도  만약 비틀즈가 전설이 되고 소시가 트렌드에 머물 수 밖에 없다면 비틀즈는 그 욕망에 사람들이 자신의 추억을 얹어놓을 빈틈을 만들어준 것이고 소시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비틀즈는 오래도록 우리들의 가슴에 남았고 소시의 음악은 바람처럼 '트렌드'란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휘발되어버리는 것이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찰나의 음악도 그 존재의미가 충분히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정말 오래도록 사랑받는 노래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게 하고, 내일을 살아갈 새 힘을 얻게 하고,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촘촘히 엮인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곡이 아닐까? 바로 그 때문에 'gee'나 'oh'보다 'yesterday'란 노래가 더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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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도 맥을 샀었다.
아마도 모델명이 파워맥 7500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 형편으로 보나, 집에 또 다른 PC가 있었던 것으로 보나 대단한 무리수였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아이팟도 없었고, 스티브 잡스도 몰랐고, 무엇보다 주위에 맥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회에서 주보를 인쇄해주던 기획사에 맥이 있었는데, 내가 맥을 통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퀔 익스프레스'로 주보를 편집하는 일이었다(그것도 컬러가 아니라 올흑백으로-_-;;;)
디자이너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회학도였으므로 포토샵도 일러스트레이터도 쓸 일이 없었으니...
결국 눈물을 머금도 되팔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유니타스브랜드 이번 호 특집 기사중 '애플에 중독되다, Apple code'를 읽으면서 그 '아픈?' 기억이 다시금 새롭다.
나는 매니아가 아니었으므로 '견디지' 못하고 팔아버렸지만, 이 세상에는 나같지 않은 맥마니아들로 넘쳐난다는 사실에 쓸쓸하기도 하다.

'아마 IT업계에 디지털 신이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용산(동산이 아니라 전자상가들이 밀집한 용산이다)에 있는 노트북은 네가 임의로 쓰되 선악을 알게 하는 애플의 노트북은 쓰지 말라. 네가 쓰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59p.)'

UB는 여느때처럼 도발적으로 맥북과 노트북을 평범한 사과와 선악과로 구분 짓는다.
빌 게이츠가 들으면 거품을 물겠지만 맥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적절한' 표현이라며 흐뭇해할 것이 분명하다.
나 역시 이 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지금 출시가 임박한 '아이폰'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다.
조금만,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홍대 앞 매장에서 파워맥북을 쓰다듬고 온다.
그 미칠듯한 기분은 겪어본 사람들만 알리라.

애플이라는 브랜드가 영악한(?) 것은 노트북이라는 기계를 팔지 않고 'i'(취미와 일)가 'I'(자아)가 되게 만든 점이다. 애플은 노트북을 통해(도구를 이용해서 ) 자신을 발견, 탐구, 확장, 완성 그리고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애플에게는 브랜드 중족보다는 '자기 완성'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65p.)

이쯤되면 한 브랜드에 대한 호의를 넘어 거의 찬사에 가깝다.
그러나 유니타스브랜드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많은 해외석학들이 오로지 '애플! 애플! 애플!'하고 소리 질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브랜드에겐 과찬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브랜드의 영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란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소비자가 이런 브랜드를 너무도 갈망하고 있는 탓이다.

이 아티클을 읽는 나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를 듣고도 다리가 부러져 쫓아가지 못하는 소년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간절함이 더 뼈에 사무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티클은 브랜드 중독의 이유에 관해 '그냥'이라는 답변으로 마무리한다.
소년이 마을사람들에게 대답했듯이,
그 소리가 그저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고...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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