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로버트 라이시는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그 스스로가 워커홀릭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그 일을 사랑한 모양이다. 그렇게 일했으니 인정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장관직을 내려놓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이런 스토리가 아주 드문 것은 아니나 책의 서두에 밝히는 그 이유를 읽어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자가 여느 날처럼 출근을 서두르던 어느 날 아침, 아들이 그를 붙잡고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마음씨 착한, 그러나 바쁜 아빠는 솔직하게 아마도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널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아이를 달랜다. 하지만 아들은 반드시 오늘이어야 한다고 아빠를 조른다. 그 이유를 묻자 아들이 이렇게 답한다. '아빠가 오늘 나와 함께 있었다'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아야만, 그러니까 밤에 자신과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 실제로 아빠가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말한 것이다. 저자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날로 사표를 쓴다.


어쩌면 사적일 수도 있는 저자의 경험담을 맨 앞에 쓰는 이유는 그가 이 책에 쓰고 있는 '신경제' 시대의 변화가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되어서다. 매끄러운 번역 탓인지, 아니면 저자 특유의 스토리 텔링이 진정성 있어서 그런 것인지 이 책은 내용의 무게게 비해 의외로 잘 읽힌다. 특히 미국의 과거사로부터 현재, 미래를 통찰해서 설명해주는 그의 안목은 마치 이륙 후 땅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찔하고 놀랍던 첫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눈 앞의 현실을 붙잡기 위해, 발등에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일반적인 책들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다. 그것이 혹자에게는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은 또한 브랜드의 기원 혹은 태생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말한다. 자급자족의 경제에서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를 거쳐 양과 질의 끝없는 혁신을 요구하는 '신경제'시대에 왜 브랜드가 중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2000년 대 초에 쓰여진 책이지만 워낙 거시적으로 바라본 탓인지 십 수년이 지난 책인지 금방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브랜드의 기원에 대한 통찰이 중요한 이유는 조금 더 긴 안목으로 브랜드의 미래를 읽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뭔가'를 기대한 이에게는 다소 맥 풀리는 '미국식 긍정'으로 성급하게 결론을 맺는다. 따지고 보면 어떤 답을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반추를 통한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기 위한 저자의 깊은 성찰 과정을 보여준 것이니 딱히 불만이라고 말할 것은 없다. 더구나 미국의 과거와 오늘은 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대입하기엔 더 없이 좋은 모델이 아니던가. 급행 열차가 아닌 완행 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의 느긋한 즐거움을 떠올린다면, 게다가 입에 착착 감기는 훌륭한 번역의 묘미를 떠올려 봤을 때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아니 확신이 든다.


무엇보다 이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서 읽어야겠다.

가능하면 같은 출판사, 혹은 번역가가 옮긴 책으로.


p.s. 이 남자의 키가 150이 채 안된다는 사실을 독서 중에 우연히 알았다. 그가 더 당당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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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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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필을 써 본 지가 과연 언제였을까?
기억의 끝자락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연필보다는 샤프 펜슬이 먼저 잡힌다.
제도 샤프가 가장 흔했고 중학교 무렵엔 흔들어 샤프의 대유행이 있었으나 잠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무엇으로 쓰는가가 중요하지 않았다(오직 성적이 중요했다).
펜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을 파고들면서 연필과 펜을 떠나 뭔가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어져버렸다.
그래서 책상에서 이 연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정말로 이 '연필'이란 것이 신기해서 한참을 만져보았다.

파버 카스텔,
무려 250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다.
구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육각형 연필을 최초로 만들었으며, 필기구의 브랜드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HB, 2B와 같은 연필의 규격을 스스로 표준화했고 지금은 세계 표준이 되었다.
연간 20억 개 이상의 연필과 색연필을 생산하며 120여 개국에 수출한다.
2009년 매출만 4억 5천만 유로에 달한다.
한 마디로 ‘연필의 원형’이라 할 만한 회사다.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테디셀러 카스텔 9000 역시 낱개 가격이 1000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하나의 명품을 만날 수 있는 제품군이 연필 말고 또 있을까?
호기심으로 아들이 가지고 다니는 동아연필, 문화연필도 함께 깎았다.
연필업계의 양대 브랜드로 알려진 스태들러와 톰보우도 함께 샀다.
녹색의 파버, 파란색의 스태들러, 검은색의 톰보우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동아연필... 흠.

나름 키보드의 키감에 민감한 편이다.
‘타닥’거리는 키감에 반해 가격 대비 성능에 의문을 품은 채로 소니 노트북을 오랫동안 써왔다.
중국산으로 전락한 씽크패드를 고민 끝에 회사 노트북으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 ‘쫀득쫀득’하다는 키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번 써보면 이들 연필의 미묘한 필기감을 구분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파버 카스텔은 카스텔 9000 말고도 보난자를 골랐다.
스테들러는 노리스와 마스 루모그라프가 유명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름 연필계의 스테디셀러이자 명품으로 불리는 애들이었다.
일본연필의 대표모델은 톰보우의 모노J,
그런데 동아연필은 모델명을 읽고 순간 놀랐다.
‘** 태권도’
한 번 더 읽어보고서야 태권도장에서 나눠준 공짜 연필임을 알았다.
문화는 ‘더존’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 그리고 상당히 많은 글을 써보았다.
손목이 아파질 때까지.
과연 최고의 연필은 어떤 녀석이었을까?

솔직히 나는 너무 물러서 버터로 불린다는 일본연필 톰보우가 싫었다.
같은 HB인데도 카스텔 9000은 지나치게 단단해 흐린 글씨가 이어졌다.
놀랍게도 내가 기대한 ‘사각거림’을 보여준 연필은 다름 아닌 태권도 연필, ‘동아연필’이었다.

결코 작위적인 설정이나 반전을 기대하고 이렇게 쓴게 아니다.
진심으로 나는 동아연필의 거친 필기감이 마음에 들었다.
(파버 카스텔의 회장이 연필의 물성은 원래 거칠다고 두둔했던 기사가 떠올랐다)
100년 전통, 250년의 역사, 연필의 원형 따위는 그저 역사일 따름이다.
연필은 그저 연필이지 브랜드란 이름으로 압도적인 필기감을 기대한 내가 어리섞었는지 모른다.
물론 카스텔 9000은 그 특별한 작업 공정으로 2,3배에 이르는 필기거리와 부러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
톰보우는 세제곱 밀리미터당 100억개에 달하는 입자로 전문가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연필이 되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는 이상 수퍼카가 필요하지 않듯이 연필은 그저 연필 본연의 임무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적당한 품질, 저렴한 가격으로 글씨만 쓸 수 있다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우리나라 문구 시장은 현재 거의 고사 상태다.
필기구 매장의 대부분은 일본 펜들이 차지하고 있고, 독일 브랜드들은 저마다의 별도 매장을 가지고 손님을 맞는다.
국산 연필의 품질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는 평이고, 맏형 격인 동아연필은 IMF를 지나면서 그나마 국내 시장의 70%를 잃은 경험이 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국산 브랜드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연필을 만드는 공정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국산 연필이 오로지 떨어지는 품질 때문에 이런 현실을 맞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답은 어떨까?
독일과 일본 연필들은 ‘브랜드’가 되었지만 국산 연필은 여전히 그저 ‘연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연필이 연필인 것이 무슨 죄일까?
하지만 브랜드가 된 연필은 85만 원에 팔리지만 그렇지 않은 연필은 1000원을 받기 힘들다.
브랜드가 된 연필은 스스로를 ‘창조성의 도구’로 미화하지만 연필을 만드는 사장님은 몇 백원짜리 연필을 만들고 있다며 스스로를 푸념한다.
그리고 이 위치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네이버 캐스트에 오른 윤광준 씨의 ‘파버 카스텔에 관한 글’에 수 백개의 덧글이 달렸다.
많은 이들이 수십 만원짜리 연필에 대한 저자의 감동을 물신화에 빠졌다며 성토하고 있었다.
혹자는 비싼 펜이 사람의 품격을 만들지 않는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산 연필이 외국에 수십 만원의 가격을 팔린다 해도 여전히 같은 비난을 할까?
비난하는 그들은 가격 대비 성능에 만족하며 명품백을 외면할까?
수십 만원짜리 노스 페이스 잠바를 절대로 입지 않을까?

좋은 브랜드는 기술과 전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브랜드는 만드는 이의 고집과 철학에 의해 시작되지만,
정말로 꽃을 피우는 것은 그것을 쓰는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줄 때이다.
250년 파버 카스텔의 역사는 어쩌면 이것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장인에 대한 예우가 유난히 깍듯한 독일과 일본에서 최고의 자동차와 연필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버카스텔 UFO 퍼펙트펜슬 브라운,
첫 째의 책상에서 몰래 가져온 4만원 짜리 이 연필의 필기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이까지 짧아 훨씬 더 빨리 닳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연필을 쓰는 순간만큼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동아가, 문화가 이런 경험을 외국 친구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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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일하는 회사는 ‘브랜드 전문지’를 만드는 회사다. 격월로 브랜드에 관한 매거북(잡지가 아닌 단행본, 더 정확하게는 중간 형태의)을 발행하며 그 명성을 바탕으로 ‘컨설팅’을 한다. 이 책의 나이는 6살, 내가 입사한 지는 5년 차에 접어든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미 이 전문지의 탄생 전에 약 7년 간 컨설팅의 경험을 쌓은 분이다. 이름도 없는 지방 기업에서 런칭한 브랜드를 수천 억 짜리 브랜드로 키웠을 만큼 능력 있으신 분이다.

문제는 나다. 언젠가 각계 전문가들이 모인 스터디 모임에서 ‘브랜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횡설수설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가 ‘브랜드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올 때면 진땀이 난다. 하지만 더 겁나는 질문은 따로 있다. 바로 ‘그렇게 브랜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당신은 과연 일상 생활 속에서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는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단 하나의 대형 마트만 있다. 시장도 없고 경쟁 마트도 없고 이렇다할 가게들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번 돈의 삼분지 일 정도는 고스란히 마트에 갖다 바치는 셈이다. 그래서 대개는 이 마트에서 잘 알려진 상표를 찾아 가격 대비 성능이나 효능이 확인된 제품들을 구매할 뿐이다. 어쩌다 1+1이나 특별 할인 상품을 고르면 로또를 맞은 기분이 드는걸 어쩔 수 없다.

흠...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브랜드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대신할 수 있으며, 좋은 브랜드를 발굴하고 이들을 도움으로써 브랜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회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하고 쓴 대로 살고 있지 못한 셈이다. 과연 나에게 브랜드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의 기준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 생태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얼마 전 네이버에 윤광준 씨의 글이 올라왔다. 생활 속 명품을 다룬 ‘윤광준의 생활명품’이란 책의 일부를 옮겨 싣고 있었다. 가격에 매이지 않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글솜씨에 매료되었던 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라온 덧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환호가 아니었다. 욕설에 가까운 비아냥거림이 즐비했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저자를 물건을 물신화하며 사치와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를 감동시켰던 글들이, 좋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을 가르쳐주었던 글들이 길거리의 빈 콜라병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 덧글들이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거였다.

“명품을 쓴다고 해서 쓰는 사람의 품격이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싯가 85만원 짜리 파버 카스텔에 관해 쓴 이 글에 달린 덧글의 일부다. 덧글을 단 이는 1,000원짜리 연필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며 값싼 제품을 쓰는 사람이라 해서 품격이나 안목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윤광준씨가 쓴 글 역시 나름의 의도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상품을 단순히 그것이 가진 원래의 효용과 용도로만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건을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을 글로 남겼을 뿐이다. 그에게는 수 천만원짜리 오디오이든 1,000원짜리 막걸리이든 그것이 가진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면 모두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물건이 인간 정신이 물건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그에게 파버 카스텔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연필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체험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해없기를...
적어도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4년 넘게 일하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의 물건으로 교감까지 나눌만큼의 내공은 쌓지 못했다. 물론 애플과 스타벅스와 같은 예외는 있다(이들이 단순한 스마트폰, 혹은 커피숍 이상의 그 무엇임을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두 가지만 넘어서면 아뜩해진다. 과연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상용품들을 단순한 소모품 이상의 브랜드로 인식하고 소비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덧글들에도 할 말은 있다. 300원짜리 모나미로도 충분하다고 목소리 높이는 덧글의 주인공이 2,30대의 직장 여성이라면 과연 가격 대비 성능만으로 가방을 고르고 있을까? 그가 만일 고등학생이라면 노스 페이스가 아닌 국산 오리털 파카만을 입는 친구일까? 모를 일이다. 과연 그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실용과 합리성에 기반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만약 덧글을 단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이들이니 나이를 막론하고  존경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끌린다. 브랜드를 단순히 사치와 허영, 물신화의 결과로만 매도하기에는 그것이 가진 매력이 너무 선명하다. 실제로 그것은 핸드폰 시장을 커피 시장을 송두리채 바꿔놓지 않았는가. 그 많던 다방들이 사라지고 스타벅스는 커피숍이라는 새로운 문화 생활의 진앙지가 되었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수천 만대가 팔리던 핸드폰들이 피처폰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낸 암호의 해독을 위해 6년에 걸쳐 26권의 책을 만들었고 적어도 브랜드에 관한 최초의 전문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브랜드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브랜드가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형이상학적인 수사의 뒤에 숨어 그것에 대한 정의를 회피해선 안된다.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체험해보고 오감으로 그것의 실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주는 가치를 모두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가장 큰 명분이니까). 그래서 브랜드를 특정 마니아나 학자 혹은 전문가의 영역에서 나같이 막눈을 가진 보통 아저씨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해보고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3.

문제는 대상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즐비한 1회성 소비재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명품까지 모두 경험해보고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제품들이 ‘브랜드는 이것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돈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우리가 브랜드라 부르는 많은 제품들이 성능 대비 가격대가 비싼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브랜드이면서 손쉽게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제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때 문득 연필이 떠올랐다. 파버 카스텔에 윤광준씨가 소개한 85만원 짜리 그라폰 모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카스텔 9000의 가격은 단돈 1,000원이다.

게다가 나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연필 끝의 촉감, 키보드의 키감, 만년필의 사각거림을 따져 쓸만큼 보통 사람보다 쓰는 경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를 옮겨 쓰고 틈만 나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교보문고의 핫트랙스를 찾아 다양한 종류의 연필을 구입했다. 한 번도 연필을 브랜드로 구매해본 경험이 없는터라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다양한 사전 정보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이드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연필들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과연 브랜드라 불리우는 연필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 우리가 굳이 그것을 구분해가면서 써야할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격 대비 성능으로만 따질 수 없는, 그래서 많게는 몇 배의 가격 차이를 만들어내는 브랜드의 핵심적인 가치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이야기는 그 차이를 다양한 상품을 통해 발견해가는 1년 간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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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실!

완벽한 하루 2009. 11. 11. 00:18


"덕만은... 아직... 이더냐?"

평소에 '선덕여왕'을 거의 보지 않던 저도 어제와 오늘 방송분은 보았습니다.
미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서.
엿가락 늘이듯 길어진 스토리지만 어차피 광고로 먹고 사는 방송의 생리를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오늘 고현정이 보여준 연기는 길이길이 인구에 회자될 명연기였음에 분명합니다.
이 미실의 엔딩을 위해 들인 작가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미실이 그토록 얻고 싶어 했던 그것, 얻으려고 했던 그것,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브랜드가 간절히 다다르고 싶은 궁극의 경지가 아닐런지요.
그 존재만으로도 뿌듯해지는 브랜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그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는 브랜드를 제 손으로 만들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CEO아 브랜더들이 간절히 바라는 꿈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 가족은 물론 인간성까지도 팽개치며 신기루와도 같은 그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둘래요."

'더냐'로 일관하던 서슬퍼런 어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 남자의 여자, 한 아들의 어머니로 찰나처럼 돌아오던 인간적인 미실의 모습을 혹 보셨습니까?
아주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저는 보는 내내 그것이 과연 '연기'만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미실이 그러했듯 현실 속의 고현정도 그 비슷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저토록 열렬히 자신을 태워가며 연기했던 것은 아닐런지요.
그리고는, 그렇게 독하게 살아가기 위해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아두었던 회한을 작은 독백을 통해 설핏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인간의 욕망이란 때로는 인간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 그것을 만들어낸 주인에게 날카로운 화살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미실도, 인간 고현정도, 아니 우리 모두도 '욕망'과 싸우려는 무모한 도전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혹 오늘의 엔딩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 비난받게 될까요?

나는 미실이 '나눌 수 없도록 연모한 그 무엇'이 자신의 삶과 바꿀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만한 야망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없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대응하고, 움직이기 위해 쏟을 그 에너지를,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며, 나를 만나는 이들이 행복하게 하는데 아낌없이 모두 써버리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두 시간 넘어까지 열렬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던 모 회사 이사님의 얼굴과 조언들을 하나씩 둘씩 되새기고,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면 흥분된 목소리로 퇴근길의 내게 전화를 주셨던 사장님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직접 장에 나가 사온 생고등어로 지상에서 둘도 없는 찜요리를 해준 아내의 솜씨를 떠올리고,
자신의 엉덩이에 얼굴을 갖다대라 한 후 아낌없이 방귀를 뀌어댄 네살배기 딸아이의 영민함?을 떠올리면서,
한낱 드라마이지만, 생각의 공간과 지혜의 메시지를 오롯이 담아내온 '선덕여왕'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그래서 뭔가 큰 일을 이뤄낼 듯한 흥분으로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브랜드가 사람을 닮았다면,
그런 하루를 경험하게 해줄 브랜드라야
만드는 이도, 그것을 사는 이도 행복해질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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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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