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김영사

최근의 인구통계조사에 의하면 천주교인은 무려 70%가 증가하고 불교도 조금 증가했지만 오로지 개신교만이 그 숫자가 감소했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교회 열개중 다섯개를 가지고 있다는 한국땅에서 벌어진 일?치고는 작지 않은 뉴스꺼리다.
그만큼 이땅의 개신교에 대한 인식이 곤두박칠 치고 있다는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해는 마시길.
나는 누구보다도 크리스천임을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른바 '예수쟁이'이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기 위해 나름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판은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그 폐쇄성에서 나온 이기주의, 배타주의가 아닐까 한다.
또한 신앙과 삶이 유리된 이중적인 태도들에 대한 실망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유일신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 한분이라는 사실이 다른 종교에 대한 몰이해로 이해되는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황금율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구원에만 자족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를 꾸짖기보다 실제로 우리들의 삶속에 들어와 모범을 보여주는 예수님에 대한 얘기이다.
아마 예수님이 이 시대에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리라는 생각을 해봤다.
왜냐하면 2000년전에 바로 이런 모습으로 이 땅을 살다 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이유는 단순하다.
죄로 인해 멀어진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는 방법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완전한 선과 정의'의 존재인 하나님이 죄로 물든 인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죄값을 대신 치르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는 이 기본적인 진리에 매달리기보다는 부차적인 목적들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없는 다른 목적들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인간의 욕심일 뿐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잇지 못한다.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꼭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는 사실감, 그리고 꼭 그렇게 대화할 것 같다는 현장감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누구나 아는 진리이긴 하지만 언제나 멀게 느껴졌던 '기독교'라는 종교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크리스천이든 아니든간에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제발 제대로 믿자.
그리고 진실되게 전하자.
그러한 과정에 필요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많은 행위와 노력들이 어쩌면 그분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자.

이 책을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를 통해서 내신 그 뜻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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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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