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식

습작 2008. 4. 17. 23:51
그 일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 빛과 소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단 1초도 되지 않아 어둠과 침묵 속에 깊이 잠겨버렸다. 또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비로소 그의 눈 앞에 짙은 푸른색으로 채워진 낯선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달무리처럼 희끄무레한 빛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몽환적인 일렁임으로 가득한 달리의 유화를 닮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선명한 어떤 색의 배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그것은 햇빛으로 가득한 해변에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앞을 가릴 때 느꼈던 답답함과 닮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어두움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곧 그가 지금 바닷물 속에 빠져 있으며 남들처럼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넋 나간 듯 물 속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런데 전혀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인식만큼은 무서우리만치 또렷했다. 그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언젠가 물에 빠지고도 허우적대지 않으면 그만큼 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경우가 그랬지만 아예 지금처럼 넋을 놓은 상태라면 허우적대다 죽는 것과 매 일반일 것이다.

죽는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보다 아쉬움 쪽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쟎아. 나는 푸념도 원망도 아닌 주절거림을 속으로 삭이면서도 이상스러울만치 편안한 느낌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편안했다. 책이나 TV, 영화속에서 나오는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과는 분명히 달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의외로 편안했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사실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당시 그는 약간의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질식과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의 정신적인 충격이 그를 덮친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하리만큼 그의 의식은 또렷했다. 이 모든 일은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10초도 이어지지 않은 짧은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곧 그의 몸은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고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가 배들을 해안의 자갈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듬어진 통나무를 잡고 헤엄 비슷한 것을 치고 있었고, 그 통나무가 갑자기 팽그르 도는 바람에 그가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것이다. 다행히 바다가 땅만큼 익숙한 동네 아이들, 형들 속에서 그 일이 벌어졌고 형들 중 하나가 그의 머리를 잡고 냉큼 끌어올리면서 곧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아주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도 먼 발치서 이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그다지 심각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물에 빠졌지만 곧, 정말이지 아주 금새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고 바다와 접해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상이었다. 모두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바다와 친해졌고 또한 자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만큼은 그 순간 성장이 멈추어버렸다. 적어도 두려움에 대한 그의 내성은 그 때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물 속에 있었던 그 순간보다 사실 물 밖으로 나와 그 장면을 회상하는 두려움이 그에겐 더 컸다. 그는 이후로 수영을 하지 못했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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