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한 프로그램에 아내가 출연하게 되었다.
좋은 일은 아니고 평소 첫째 아이 문제로 힘들어하다 아내가 사연을 올렸는데 덜컥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인데 이틀 내내 와이프를 따라다니며 촬영을 하고 생방송 하는 날에는 방송국에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와이프야 각오를 했다지만 평소 카메라 공포증이 있는 나로써는 괜한 두려움이 앞섰다.
와이프는 '당신이 무슨 걱정이야. 누가 나오게 해준대?' 하며 면박을 주었지만 그 비슷한 프로그램의 경우 꼭 몇 꼭지는 남편이 등장해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결국 하루동안 전문가 면담(설문이 600문항 가까이 되었고, 투표일을 꼬박 여기에 쏟아부었다), 이틀간의 촬영, 그리고 본방송만 남은 찰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등장한 분량이 빠져서 재촬영르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촬영에 응할 생각이 없었지만 와이프 인터뷰를 위해 애들을 봐달라는 조건으로 일찍 퇴근했다가 약 1시간 가량 얼굴 옆에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경험을 했다. 매우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기분 좋게 넘어갔다.
그런데 그 촬영을 다시 해야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내가 출연하게 될지도 모를 프로그램을 아내와 함께 보게 됐다.
사연인즉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 때문에 아내가 힘들어하는 내용이었다.
남편이 나오는 장면이 몇 나오면서 (내가 보기엔) 사회자와 전문가, 그리고 그의 아내가 나누는 얘기들이 '생방송'으로 들려오는데 참기 힘들었다.
중국에서 의사면허를 따왔지만 국내에서는 소용이 없어서 막노동을 해야 하는 남편이 너무도 무능하게 비쳐졌고, 문제는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방송을 허락한 남편의 용기가 가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프로를 본 다음에 재촬영 의사를 밝혀왔을 때 내 기분이 어떠했을까?
물론 아내가 올린 사연은 앞서 말한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아이의 문제는 언제나 부모를 통해서 해답을 찾는 기존 프로그램을 생각해봤을 때 다시 그 카메라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나오는 촬영분을 통해 나의 문제가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영되는 것이다.
책으로 묶어져 나올 정도의 EBS최강 프로그램에...

그래서 재촬영을 거부하는 의사를 아내를 통해 전달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전화가 왔고 아내의 제안대로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틀밤을 우리집 앞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물론 나는 몰랐다)
어제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카메라 감독을 만났다.
매우 불쾌해서 응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결국 아내의 마음을 완전히 닫게 만들었다.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아내의 노력이 결국 또 다른 가정불화를 낳은 셈이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물론 문제의 핵심은 내게 있다.
그깟 어떻게 비치던 무슨 상관이야 하고 호기 있게 몇 컷 찍어줬으면...
그것도 싫으면 감독을 만나 나의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으면...
그런데 회피로 일관하다가 뜻하지 않게 일이 커져버렸다.

사실 나도 어제 매우 화가 났었다.
촬영에 응하지 않을 분명한 자유가 있고, 나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아닌데도 아내를 통해 수없이 방송에 대한 욕심을 채우려한 방송사측이 밉다. (아마 내가 촬영하지 않으면 방송이 힘들다고 얘기한 모양이다)
중간에 촬영을 포기하면 위약금을 내야한다고까지 엄포를 놓은 상황이고, 자신의 촬영 때문에 이틀을 꼬박 따라다닌 감독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이틀밤을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얘기 앞에 얼마나 난처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나는 그 촬영이 끔찍히 싫었고 아내도 그것을 알기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나의 고집스러움과 쉬운 문제를 어렵게 꼬아가는 관계의 미숙함이 또 한 번 큰 일을 냈다.
나도 이런 내가 밉다.
하지만 방송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가정을 돕는' 프로그램이 '가정을 깨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것도 속상해죽겠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나의 이런 모습 때문에 '넌덜머리가 난다'는 아내의 문자를 받고 나니 머리가 멍하다.

그래도 어쩌지?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해도 나는 또 다시 고집 아닌 고집을 피웠을 것 같다.
나도 이런 내가 밉다.


* 이러한 스토리로 깨어진 관계들

1. 신혼 부부모임
2. 이계환 집사님 샘터모임
3. 최원재 집사님 목장

'완벽한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페라떼, 클라식 마일드를 돌려줘!  (0) 2008.04.25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0) 2008.04.23
당신은 어느쪽인가?  (0) 2008.04.22
서른 여섯, 혹은 일곱  (0) 2008.04.19
와이프의 글쓰기  (0) 2008.04.18
Posted by 박요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