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비밀

습작 2008. 7. 28. 23: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 전 일본 출장을 다녀왔을 때였다.
2박 3일의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퇴근길을 서둘렀다. 이미 첫째는 약속한 초콜릿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확인 전화까지 10분 전에 걸어온 후였다. 와이프를 위해서는 사장님의 선물까지 보태 두 벌의 여름옷을 준비했고, 서원이를 위해서는 따로 책 선물도 있었다. 곧 눈앞에 펼쳐질 환상적인 가족의 재회 장면을 떠올리며 가쁜 숨을 몰아쉰 채 집 앞에 선 나는 우선 가볍게 노크를 두 번 했다. 너무 약하게 두드렸는지 반응이 없었다.

내가 직접 열까 생각해보니 여행용 가방에 넣어둔 열쇠가 떠올라 다시 한번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짜증이 났다. 게다가 볼 일까지 급해지자 마음마저 조급해졌다. 여행용 가방을 열어젖히고 잡다한 물건들 속에서 열쇠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조금 더 세게, 그리고 빠르게, 더 많이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그러나 그때까지도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뱃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다.
집을 비운 지 사흘이 지나 가장이 돌아왔는데 문조차 열어주지 않다니...

단순히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욕구 불만을 떠나 가장에 대한 인신 모욕으로까지 짜증의 원인이 급속도로 변질되어 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순간은 찰나이며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종종걸음치며 키워왔던 찬란한 희망들이 거짓말처럼 증오?의 불길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 순간 문이 열렸고 짜증 어린 아내의 얼굴이 현관 전등에 의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애들을 어떻게 재웠는데 큰 소리 내고 그래. 열쇠 있으니까 혼자 열고 들어오면 되잖아."
어이가 없어하는 나를 두고 아내는 멀어져갔고 곧이어 쾅 하는 안방 문 소리를 들은 나는 허탈함에 한동안 멍하니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힘들게 바깥일을 하고 돌아와 따뜻한 가정의 환대를 받고 싶어하는 가장과, 온종일 아이들을 돌보느라 손가락 까닥 하나 하지 못할 체력으로 그 남편에게 베풀 수 있는 건 짜증밖에 남지 않은 아내의 삶이다. 부부싸움이 언제나 사소한 일로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프로세스와 메커니즘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은 불씨가 심지어는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거대한 폭발의 원인이 많은 경우 아주 작은 스파크에서 비롯되듯이...

10분 뒤 아내는 다소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 때문에 어렵게 든 잠이 깨어 버렸다며 칭얼거리는 콧소리를 내면서 작은방 문을 열었고, 나는 그제야 아내와 아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을 꺼내 들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굳이 이전의 상황에 대한 브리핑은 필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서로 이해해주고 어루만져주는 작은 관심이자 배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충분히 연약한 존재이다. 타인이나 지인으로 살아간다 해도 결코 볼 수 없는 그들만의 뒷모습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통해 관계 맺어지는 배우자는 그 뒷모습을 좋은 싫든 항상 바라 보야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품어줄 수 있는 것도,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것도 배우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약점과 실수, 부족함에 대해 뱉어내는 수많은 비수들이 오늘도 허공을 날아다니며 희생양을 찾는다. 만약 이에 대한 진실에 눈 뜬 사람이라면 감히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왜 결혼을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느냐고? 그건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비밀이다. 결혼 후에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그 찰나의 행복, 숨 막히는 기쁨들을 어떻게 짧은 글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늦은 밤 퇴근해서 개구리 다리를 하고 자는 딸의 머리에서는 쉰 옥수수 냄새가 난다. 그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누리기엔 벅찬 감격이고 행복이다. 그리고 내 믿음이 헛되지 않다면 아내는 '불만이 가득한 동지'로 살아주고 있다. 감사하고 행복할 일이다. 당신이 코웃음 칠지라도 그것은 분명한 축복이다.

아 참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결혼하지 않은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 게 결혼의 비밀이고 행복이라고...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은 찾는 게 아냐, 때가 되면 와"  (4) 2008.07.29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 적 있니?  (4) 2008.07.29
Knocking on your door  (4) 2008.07.09
Do you know your wife?  (4) 2008.07.08
closed  (774) 2008.07.08
Posted by 박요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