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스터

브랜드 2012. 9. 7. 11:04

홀리스터...

미국의 유명 의류 브랜드인 '아베크롬비 앤 피치'의 계열 브랜드입니다. 나름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서양인의 체형에 꼭 맞춘 브랜드로 예전부터 '인종차별'에 관련된 논란이 적지 않았죠. 동양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 바탕에 깔린 탓입니다. 그런 브랜드가 왠일로  여의도에 새로 개장한 서울국제금융센터의 IFC몰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픈 행사의 하나로 경복궁에서 촬영을 했던 모델 하나가 '찢어진 눈'으로 사진을 찍은 탓이죠. 이 포즈는 전형적인 '동양인 비하' 메시지로 유명합니다. 미국에서는 동양인으로부터 주문을 받은 스타벅스 직원이 컵에 이 찢어진 눈의 그림을 그려 넣어서 적지 않은 잡음이 일기도 했습니다.


아베크롬비 앤 피치, 홀리스터 모두 브랜드 정체성의 근간에 '우월한 신체에 대한 동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매장엔 언제나 '우월한' 신체를 가진 남자 모델들이 해상 구조원처럼 상의를 탈의하고 호각을 건 채 손님들을 맞죠. 그것이 이 브랜드를 '차별화'시킨 가장 큰 이유인 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 미국 애틀랜타에 위치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음료를 주문한 한인에게 백인 종업원이 '찢어진 눈' 을 그려넣어 주어 논란이 되었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2111544561001)


하지만 의문이네요. 무조건 '차별화'에만 성공해도 좋은 것인지. 그 메시지가 잘못된 신념이나 가치에 근거한 것이어도 홍보와 매출에만 도움이 되어도 상관없는 것인지. 독일 민족에 대한 우월감으로 전 세계를 유례없는 참혹한 전쟁과 희생으로 몰아넣은 히틀러의 사례를 꼭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이런 생각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자기만의 생각'을 제품에 담아 이에 동의하는 소비자들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모든 브랜드의 염원이자 소망이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품질과 기능만으로 승부하지 않아도 되고 타 브랜드와의 경쟁을 통한 생존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그 출발은 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꼭 여기에 장황하게 써야 할 필요는 없을테지요?




Posted by 박요철
,


(이미지 출처: http://danbis.net/12557)


요즘 이런 풍경 자주 봅니다^^

바로 '훼미리마트'가 'CU'로 이름을 바꿨기 때문인데요.
많이들 아시겠지만 '훼미리마트'는 1973년 탄생한 대표적인 일본 편의점 브랜드입니다.
(참고로 같은 일본 브랜드인 '세븐일레븐'은 원래 미국에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격화되는 편의점 시장에서 로열티도 부담스러웠을테고, 20년 넘게 쌓은 노하우에서 오는 자신감도 있었겠죠?
아무튼 딱히 입에 붙는 이름은 아니지만 자체 브랜드에 대한 욕심을 용기있게 실천했다는 점은 높이 사주고 싶습니다.

다만...
점주들의 불만이 큰 모양입니다.
동의를 얻어 시작한 브랜드 개편이라지만 '훼미리마트'의 브랜드명을 믿고 편의점을 시작한 점주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네요.
사람이든 기업이든 그만큼 '이름'이, 아니 '브랜드'가 중요하다는 반증도 되겠구요.

문득 김애란 작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라는 단편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은 편의점의 멋진 알바가 혹이라도 자신의 모든 라이프 스타일을 꿰고 있지 않을까 해서 불안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구매하는 곳이고 보니 조금만 유추해도 자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콘X을 구매하는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식은 땀을 흘립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반전이 있습니다.
알바 남자가 주인공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음을 알려주는 작은 사건이 일어나거든요...

대략 통 유리 안의 진열대만 보아도 '편의점'인 줄 짐작 가능한 상황에서
고개 들어 브랜드명까지 확인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네요.
자체 브랜드의 삼각김밥과 아이스크림, 컵라면의 판매가 꽤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제게는 '편의점'일 뿐이지 '훼미리마트'는 아닌데 말입니다.

(그나저나 CU라...
저는 왜 자꾸 포도씨유가 생각나죠?)

<자료 출처>

'브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보레와 아이폰5  (0) 2013.02.04
홀리스터  (0) 2012.09.07
파버카스텔 UFO 퍼펙트펜슬 브라운  (4) 2012.08.16
(도대체) 브랜드란 무엇일까? - 프롤로그  (1) 2011.12.12
가야금을 사랑한 미국인, 조세린  (1) 2011.08.18
Posted by 박요철
,


마지막으로 연필을 써 본 지가 과연 언제였을까?
기억의 끝자락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연필보다는 샤프 펜슬이 먼저 잡힌다.
제도 샤프가 가장 흔했고 중학교 무렵엔 흔들어 샤프의 대유행이 있었으나 잠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무엇으로 쓰는가가 중요하지 않았다(오직 성적이 중요했다).
펜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을 파고들면서 연필과 펜을 떠나 뭔가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어져버렸다.
그래서 책상에서 이 연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정말로 이 '연필'이란 것이 신기해서 한참을 만져보았다.

파버 카스텔,
무려 250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다.
구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육각형 연필을 최초로 만들었으며, 필기구의 브랜드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HB, 2B와 같은 연필의 규격을 스스로 표준화했고 지금은 세계 표준이 되었다.
연간 20억 개 이상의 연필과 색연필을 생산하며 120여 개국에 수출한다.
2009년 매출만 4억 5천만 유로에 달한다.
한 마디로 ‘연필의 원형’이라 할 만한 회사다.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테디셀러 카스텔 9000 역시 낱개 가격이 1000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하나의 명품을 만날 수 있는 제품군이 연필 말고 또 있을까?
호기심으로 아들이 가지고 다니는 동아연필, 문화연필도 함께 깎았다.
연필업계의 양대 브랜드로 알려진 스태들러와 톰보우도 함께 샀다.
녹색의 파버, 파란색의 스태들러, 검은색의 톰보우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동아연필... 흠.

나름 키보드의 키감에 민감한 편이다.
‘타닥’거리는 키감에 반해 가격 대비 성능에 의문을 품은 채로 소니 노트북을 오랫동안 써왔다.
중국산으로 전락한 씽크패드를 고민 끝에 회사 노트북으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 ‘쫀득쫀득’하다는 키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번 써보면 이들 연필의 미묘한 필기감을 구분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파버 카스텔은 카스텔 9000 말고도 보난자를 골랐다.
스테들러는 노리스와 마스 루모그라프가 유명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름 연필계의 스테디셀러이자 명품으로 불리는 애들이었다.
일본연필의 대표모델은 톰보우의 모노J,
그런데 동아연필은 모델명을 읽고 순간 놀랐다.
‘** 태권도’
한 번 더 읽어보고서야 태권도장에서 나눠준 공짜 연필임을 알았다.
문화는 ‘더존’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 그리고 상당히 많은 글을 써보았다.
손목이 아파질 때까지.
과연 최고의 연필은 어떤 녀석이었을까?

솔직히 나는 너무 물러서 버터로 불린다는 일본연필 톰보우가 싫었다.
같은 HB인데도 카스텔 9000은 지나치게 단단해 흐린 글씨가 이어졌다.
놀랍게도 내가 기대한 ‘사각거림’을 보여준 연필은 다름 아닌 태권도 연필, ‘동아연필’이었다.

결코 작위적인 설정이나 반전을 기대하고 이렇게 쓴게 아니다.
진심으로 나는 동아연필의 거친 필기감이 마음에 들었다.
(파버 카스텔의 회장이 연필의 물성은 원래 거칠다고 두둔했던 기사가 떠올랐다)
100년 전통, 250년의 역사, 연필의 원형 따위는 그저 역사일 따름이다.
연필은 그저 연필이지 브랜드란 이름으로 압도적인 필기감을 기대한 내가 어리섞었는지 모른다.
물론 카스텔 9000은 그 특별한 작업 공정으로 2,3배에 이르는 필기거리와 부러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
톰보우는 세제곱 밀리미터당 100억개에 달하는 입자로 전문가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연필이 되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는 이상 수퍼카가 필요하지 않듯이 연필은 그저 연필 본연의 임무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적당한 품질, 저렴한 가격으로 글씨만 쓸 수 있다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우리나라 문구 시장은 현재 거의 고사 상태다.
필기구 매장의 대부분은 일본 펜들이 차지하고 있고, 독일 브랜드들은 저마다의 별도 매장을 가지고 손님을 맞는다.
국산 연필의 품질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는 평이고, 맏형 격인 동아연필은 IMF를 지나면서 그나마 국내 시장의 70%를 잃은 경험이 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국산 브랜드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연필을 만드는 공정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국산 연필이 오로지 떨어지는 품질 때문에 이런 현실을 맞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답은 어떨까?
독일과 일본 연필들은 ‘브랜드’가 되었지만 국산 연필은 여전히 그저 ‘연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연필이 연필인 것이 무슨 죄일까?
하지만 브랜드가 된 연필은 85만 원에 팔리지만 그렇지 않은 연필은 1000원을 받기 힘들다.
브랜드가 된 연필은 스스로를 ‘창조성의 도구’로 미화하지만 연필을 만드는 사장님은 몇 백원짜리 연필을 만들고 있다며 스스로를 푸념한다.
그리고 이 위치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네이버 캐스트에 오른 윤광준 씨의 ‘파버 카스텔에 관한 글’에 수 백개의 덧글이 달렸다.
많은 이들이 수십 만원짜리 연필에 대한 저자의 감동을 물신화에 빠졌다며 성토하고 있었다.
혹자는 비싼 펜이 사람의 품격을 만들지 않는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산 연필이 외국에 수십 만원의 가격을 팔린다 해도 여전히 같은 비난을 할까?
비난하는 그들은 가격 대비 성능에 만족하며 명품백을 외면할까?
수십 만원짜리 노스 페이스 잠바를 절대로 입지 않을까?

좋은 브랜드는 기술과 전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브랜드는 만드는 이의 고집과 철학에 의해 시작되지만,
정말로 꽃을 피우는 것은 그것을 쓰는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줄 때이다.
250년 파버 카스텔의 역사는 어쩌면 이것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장인에 대한 예우가 유난히 깍듯한 독일과 일본에서 최고의 자동차와 연필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버카스텔 UFO 퍼펙트펜슬 브라운,
첫 째의 책상에서 몰래 가져온 4만원 짜리 이 연필의 필기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이까지 짧아 훨씬 더 빨리 닳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연필을 쓰는 순간만큼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동아가, 문화가 이런 경험을 외국 친구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Posted by 박요철
,

1.

내가 일하는 회사는 ‘브랜드 전문지’를 만드는 회사다. 격월로 브랜드에 관한 매거북(잡지가 아닌 단행본, 더 정확하게는 중간 형태의)을 발행하며 그 명성을 바탕으로 ‘컨설팅’을 한다. 이 책의 나이는 6살, 내가 입사한 지는 5년 차에 접어든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미 이 전문지의 탄생 전에 약 7년 간 컨설팅의 경험을 쌓은 분이다. 이름도 없는 지방 기업에서 런칭한 브랜드를 수천 억 짜리 브랜드로 키웠을 만큼 능력 있으신 분이다.

문제는 나다. 언젠가 각계 전문가들이 모인 스터디 모임에서 ‘브랜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횡설수설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가 ‘브랜드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올 때면 진땀이 난다. 하지만 더 겁나는 질문은 따로 있다. 바로 ‘그렇게 브랜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당신은 과연 일상 생활 속에서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는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단 하나의 대형 마트만 있다. 시장도 없고 경쟁 마트도 없고 이렇다할 가게들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번 돈의 삼분지 일 정도는 고스란히 마트에 갖다 바치는 셈이다. 그래서 대개는 이 마트에서 잘 알려진 상표를 찾아 가격 대비 성능이나 효능이 확인된 제품들을 구매할 뿐이다. 어쩌다 1+1이나 특별 할인 상품을 고르면 로또를 맞은 기분이 드는걸 어쩔 수 없다.

흠... 그것은 분명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브랜드가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대신할 수 있으며, 좋은 브랜드를 발굴하고 이들을 도움으로써 브랜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회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하고 쓴 대로 살고 있지 못한 셈이다. 과연 나에게 브랜드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의 기준은 무엇인가? 좋은 브랜드 생태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얼마 전 네이버에 윤광준 씨의 글이 올라왔다. 생활 속 명품을 다룬 ‘윤광준의 생활명품’이란 책의 일부를 옮겨 싣고 있었다. 가격에 매이지 않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글솜씨에 매료되었던 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라온 덧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장난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환호가 아니었다. 욕설에 가까운 비아냥거림이 즐비했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저자를 물건을 물신화하며 사치와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를 감동시켰던 글들이, 좋은 브랜드에 대한 안목을 가르쳐주었던 글들이 길거리의 빈 콜라병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 덧글들이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거였다.

“명품을 쓴다고 해서 쓰는 사람의 품격이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싯가 85만원 짜리 파버 카스텔에 관해 쓴 이 글에 달린 덧글의 일부다. 덧글을 단 이는 1,000원짜리 연필로도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며 값싼 제품을 쓰는 사람이라 해서 품격이나 안목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윤광준씨가 쓴 글 역시 나름의 의도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상품을 단순히 그것이 가진 원래의 효용과 용도로만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건을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을 글로 남겼을 뿐이다. 그에게는 수 천만원짜리 오디오이든 1,000원짜리 막걸리이든 그것이 가진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면 모두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물건이 인간 정신이 물건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그에게 파버 카스텔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연필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체험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해없기를...
적어도 나는, 브랜드 전문지에서 4년 넘게 일하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의 물건으로 교감까지 나눌만큼의 내공은 쌓지 못했다. 물론 애플과 스타벅스와 같은 예외는 있다(이들이 단순한 스마트폰, 혹은 커피숍 이상의 그 무엇임을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두 가지만 넘어서면 아뜩해진다. 과연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상용품들을 단순한 소모품 이상의 브랜드로 인식하고 소비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덧글들에도 할 말은 있다. 300원짜리 모나미로도 충분하다고 목소리 높이는 덧글의 주인공이 2,30대의 직장 여성이라면 과연 가격 대비 성능만으로 가방을 고르고 있을까? 그가 만일 고등학생이라면 노스 페이스가 아닌 국산 오리털 파카만을 입는 친구일까? 모를 일이다. 과연 그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실용과 합리성에 기반한 소비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만약 덧글을 단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이들이니 나이를 막론하고  존경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끌린다. 브랜드를 단순히 사치와 허영, 물신화의 결과로만 매도하기에는 그것이 가진 매력이 너무 선명하다. 실제로 그것은 핸드폰 시장을 커피 시장을 송두리채 바꿔놓지 않았는가. 그 많던 다방들이 사라지고 스타벅스는 커피숍이라는 새로운 문화 생활의 진앙지가 되었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수천 만대가 팔리던 핸드폰들이 피처폰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낸 암호의 해독을 위해 6년에 걸쳐 26권의 책을 만들었고 적어도 브랜드에 관한 최초의 전문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브랜드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브랜드가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형이상학적인 수사의 뒤에 숨어 그것에 대한 정의를 회피해선 안된다.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체험해보고 오감으로 그것의 실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주는 가치를 모두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가장 큰 명분이니까). 그래서 브랜드를 특정 마니아나 학자 혹은 전문가의 영역에서 나같이 막눈을 가진 보통 아저씨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해보고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3.

문제는 대상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즐비한 1회성 소비재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명품까지 모두 경험해보고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제품들이 ‘브랜드는 이것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문제는 돈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우리가 브랜드라 부르는 많은 제품들이 성능 대비 가격대가 비싼 것이 현실이니까. 그렇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브랜드이면서 손쉽게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제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때 문득 연필이 떠올랐다. 파버 카스텔에 윤광준씨가 소개한 85만원 짜리 그라폰 모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100년의 전통을 가진 카스텔 9000의 가격은 단돈 1,000원이다.

게다가 나는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연필 끝의 촉감, 키보드의 키감, 만년필의 사각거림을 따져 쓸만큼 보통 사람보다 쓰는 경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를 옮겨 쓰고 틈만 나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교보문고의 핫트랙스를 찾아 다양한 종류의 연필을 구입했다. 한 번도 연필을 브랜드로 구매해본 경험이 없는터라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다양한 사전 정보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이드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연필들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과연 브랜드라 불리우는 연필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 우리가 굳이 그것을 구분해가면서 써야할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격 대비 성능으로만 따질 수 없는, 그래서 많게는 몇 배의 가격 차이를 만들어내는 브랜드의 핵심적인 가치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이야기는 그 차이를 다양한 상품을 통해 발견해가는 1년 간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Posted by 박요철
,

자아존중감

책읽기 2011. 8. 22. 23:50

근래들어 나의 최고의 관심사는 '자기다움'에 대한 고민이다. 지금까지 나의 고민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였다면 지금부터는 '나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키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는 '나'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타인의 시선이나 비교,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르침은 나의 말로 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간 삶을 통해서 아이들이 배운다는 것을 알게된 이후로 이 고민의 농도가 달라졌다. 그 답이 바로 '자기다운' 삶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자기다움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 그러나 그 영향력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용기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단점을 발견하기 위한 고단한 여정, 끝이 보이지 않는 인내, 깊이를 알 수 없는 좌절을 몇 번이고 헤쳐나올 때 생겨나는 것임을 안다. 왕도는 없다. 그러나 똑같은 여정을 거치고 껍데기만 남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화려하지는 않아도 '자기다움'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며, 내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며, 나의 아이들이 그들로부터 그러한 삶을, 나로부터 그러한 삶을 배우기 원한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무얼까? 그 답 중의 하나로 찾은 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자아존중감, 즉 자존감이란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성과를 이뤄낼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또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다.


'자기다움'의 발견에 우선하는 것은 '자아존중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 고통에 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과의 비교, 경쟁을 통한 열패감으로 숱한 인생의 루저로 전락하는가. 하지만 자아존중감은 자신감을 빙자한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들과의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무조건 자신은 최고이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자신의 장점만을 수용하기 때문에 누가 자신의 뒤에서 험담이라도 하면 기분이 나쁘고 그 단점을 인정하기가 버겁다. 진정한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감 있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무시해도 감정적 동요가 적다.


이 짧은 한 마디에 '살만한 세상의 비밀'의 숨어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남의 존재를 인정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꺼운 마음. 아이들에게 단 하나의 지혜(성경이 아닌)를 말해줄 수 있다면 이 자존감의 비밀에 대해 말해주리라.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왜 부유한 노예로 살고 있는가?  (0) 2012.09.18
십자군 탄크레디  (0) 2011.08.22
내려놓음  (0) 2011.08.17
마이 코리안 델리  (1) 2011.08.08
오리진이 되라, 강신장  (0) 2010.06.23
Posted by 박요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