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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8 이혼하세요? 3
  2. 2008.04.19 왜 글을 쓰고 싶냐구요?
  3. 2008.04.19 세상 모든 것에 이름 지어주기
  4. 2008.04.17 3. 두려움에 대하여 1
  5. 2008.04.17 2. 질식

이혼하세요?

습작 2008. 6. 18. 17:44

이혼서류를 떼러 가정법원에 다녀왔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걸으면 행정법원, 고등법원 등이 모여 있는 법원청사의 기다란 담장을 만나게 된다. 그 담장의 중간 어디쯤엔가 난 쪽문을 타고 들어가자 이혼을 생각하며 걸어갔을 많은 부부 혹은 남편, 아내들이 생각하기엔 다소 낭만적인 돌밭길이 보인다. 빗물이 고인 길 틈틈이 양쪽으로 우거진 수풀이 흔들거리며 뜻하지 않은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등법원과 함께 신관 건물을 쓰는 가정법원 1층에 들어서면 맨 먼저 은행창구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서야 흡사 구청 민원창구 같은 가정법원 창구가 나타났다. 평일 오후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순서,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이혼에 필요한 신청서 양식을 찾았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처럼 양식만을 따로 모아둔 테이블엔 얼핏 봐도 20여 종의 서류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혼에 관련된 서류 양식은 두어 바퀴를 돌았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구 옆에 앉아계신 시민 자원봉사자를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민망해서 웬만하면 직접 필요서류를 찾아 바로 나오고 싶었는데 별수가 없다.

"저... 이혼서류를 찾고 있는데요..."
"협의이혼이신가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시원스레 대답하는 자원봉사 아주머니는 서류를 꺼내 들며 내게 물었다.
이미 인터넷에서 기본적인 조사를 하고 갔기 때문에 재판이혼과 협의이혼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네..."
말꼬리를 흐리는 내게 '젊은 사람이 왜 벌써 이혼을 할까'하는 근심 어린 눈빛이 따라붙었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낚아채듯 서류를 집어들고 나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실제로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눈빛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최근 협의이혼 과정에 숙려기간이 법적인 의무사항으로 도입되고 양육의 책임에 관한 조건도 까다로워져서 이전보다는 이혼이 훨씬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긴 이전의 이혼절차를 보고 있노라면 '욱'하는 심정만으로도 충분히 쉽게 이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들을 동시에 느끼긴 또 얼마나 쉬운가를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떠난 후에는 어떤 법적인 유예조치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혼 과정은 수술실의 칼날처럼 차갑게 다가왔다. 뜨겁게 사랑하였지만, 그와 똑같은 강도로 차갑게 이혼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이혼율을 보자면 어쩌면 그 어려운 결정이 그렇게들 쉽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가다가도, 숱하게 겪어온 사람들과의 갈등을 생각해보건대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의 (풀지 못할) 갈등이라면 또 한 번 깊이 공감되기도 한다.

일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법원에 다녀왔고 이혼 서류도 떼어봤다.
머릿속에 무슨 프로그램처럼 이혼의 과정과 절차에 대한 지식도 적지 않게 쌓인 상태다.
그러나 이 일이 마무리 된다면 컴퓨터 포맷하듯이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다.
아직도 내게는 이혼이 '쿨'한 결정이기보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임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이혼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총 이혼건수는 12만4600건으로 12만5000건 가량이었던 2006년보다 400건(-0.4%) 감소했다. /뉴시스, 200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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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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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소년동아일보에 기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주의 장원을 했고 3000원짜리 두꺼운 소설책을 받았어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슨 글짓기 대회를 한다고 하면 거의 빠짐없이 나갔습니다.
언젠가 상을 받는데 저 혼자 남자애라서
'청일점'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중학교 영어시간,
갑자기 선생님이 '시'를 영어로 뭐라 하는지 아느냐 물으셨습니다.
내가 대답했죠. poet이라고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온 후 아주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나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중 3때는 소설을 썼어요.
스프링노트로 몇백페이지나 되는
지금도 그 원고는 부산에 있는 집 어딘가에 있는데
그 유치찬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꽤 스케일은 컸답니다.
배경이 미국이었는데
저는 한번도 미국에 가 본 적이 없거든요.

고등학교 국어시간,
비가 오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시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 시를 보고서 실제 시인에게 보여줬나 봅니다.
그 분이 이랬다더군요.
'고등학생의 시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이 많은 국어선생님은 그러셨어요.
'먼저 사람이 되라'

고 3때는 시집을 냈어요.
제가 쓴 시를 복사해서 시집을 열 권 남짓 만들었지요.
근사하게 사인도 해서 친구들에게 돌렸어요.
그 시집은 남아 있지 않지만
친구들은 그 시집의 제목을 기억할 겁니다.
'시에 영혼을 팔아먹은 소년'
그 후로 친구들은 저를 글 잘 쓰는 아이로 알아주었습니다.

고3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글쓰기의 소질을 다시 인정받았습니다.
그후로 10년간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글을 쓰는게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의 직장에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1년에 백권, 혹은 이백권
매주 월요일에는 서점으로 북헌팅을 다녔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서평을 써서 그로 인한 적립금만 두어달새에 몇 십만원이 쌓였어요.
그리고 그 내용들을 직원들에게 매일 아침 메신저로 나눴습니다.
딱 1년동안.

그 후로 회사 사람들은 제 외모고 공병호를 닮았다고도 하고
하는 짓?이 구본형씨를 닮았다고 합니다.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의 내용을 아시는지요?
이 책의 주인공이 딱 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쓴 블로그 글을 읽고
출판사에 계신 한 분이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언젠가 좋은 책을 쓰실 것 같다고.
저도 그럴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기를 모를 뿐이지.

한번은 나름의 영역에서 전문적인 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모임에서
'400권의 책읽기'라는 작은 강연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흥미로워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행복했습니다.

윤문을 의뢰받았습니다.
개정판의 내용을 거의 모두 새로 썼습니다.
책이 가진 메시지를 제가 가진 경험으로 풀어썼지요.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몇달동안 정말 힘들었고 또한 행복했습니다.
하루는 휴가를 내서 10시간동안 썼습니다.
화장실을 두세번만 가고 글만 썼습니다.
근래 들어 그렇게 행복한 적은 다시 없었습니다.

책, 글쓰기는 제게 운명같습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쓰게 될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이 재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행복이겠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뜻을 이루는 일이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언젠가 쓰게 될 그 책을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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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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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7)

나의 얼마 안 되는 재능 중의 하나는 '글쓰기'이다.
그리고 그 글쓰기 중에서도 나는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강점을 보여왔다.
어떤 사물, 어떤 사람, 어떤 현상에 대해
(실체와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일을 남들보다 더 수월하게 해내곤 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거나 똑같은 한 사람을 만나도 그 많은 이야기거리를 발견하고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단점도 있다.
대상을 전체적으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데다 그 방법이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즉 대상의 실체를 실랄하게 파헤치거나 일을 순서에 따라 치밀하게 행하는데 조금 철저하지 못하다.
스킨을 쓰면 두껑을 닫지 않고,
화장실을 나오면서 자주 문을 닫지 않는다.
아내는 내가 게을러러서, 혹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야단을 친다.
그 말도 맞지만 앞서 얘기한 나의 강점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

회사에서도 나의 이러한 특징은 나를 유능하게도, 혹은 무능하게도 만들었다.
상사가 누구인가, 상황이 어떠한가에 따라 나는 유능할 때도 있었고 무능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교만도 낙담도 어리섞은 일이란 것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유능함을 알아주는 사람과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나의 약점을 깨달아 최대한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리라.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것
정말 녹록치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당신은 당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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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

3. 두려움에 대하여

습작 2008. 4. 17. 23:53

두려움이란 분명히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과 같은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관한 그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또렷히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투명한 비료포대에 얹혀진 채로 두 사람의 인부에 의해 실려 가던 조그만 아이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는 그 때 할머니의 등에 업힌 채로였고 화장실의 인분에 의해 그 작은 몸뚱아리가 갈색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던 기억은 정말로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30년하고 또 몇 년을 살아오면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억에 관련된 어떤 작은 단서라도 내 귀에 들릴라치면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그의 기억 속을 훑고 지나갔다. 2살일까 3살일까. 그 때의 그는 그 장면을 인지할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장면이 혹 다른 곳에서 어떤 곳에서 본 그림이나 사진, 영화의 잔상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적어도 의식속의 그에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직접 보지 않았다면 스스로 창조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장면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그 일이 있었던 장소와 배경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만약 그 장면을 실제로 보았다고 가정했을 때, 뭔가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왜 그런것일까? 그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데 왜 충격을 받았고, 또 왜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두 세살짜리 남자 아이가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본 그 장면은 어떤 감정의 여과과정을 통해 그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그것은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공포였을까.

그가 조금 더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그 ‘두려움’은 어떤 장면이나 상황보다는 관계라는 것을 통해 조금씩 그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교’라는 곳에 가게 되는 나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의 기억도 사실 완전치 않은 것이어서 막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낯설음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그 섬으로 이사간 것은 남아 있는 사진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정말이지 아주 어렸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왜 내가 입학했던 그 시점에 만나는 친구들은 그렇게 낯설기만 한 것일까?
관계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모든 상황과 방식, 습관, 그리고 교감에 관한 이야기를 통칭하는 말이다. 굳이 전문지식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한 줄의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임을 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 관계를 조금 더 쉽게 맺으며 즐길 줄 알고 또 그와 같은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난해하고 익숙치 않으며 불편한 것으로 다가온다. 아무튼 그에게 아주 어린 초등학교의 시절은 유쾌하지 못한 몇몇의 기억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 일과 관련해 맨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초등학교 1,2학년 쯤 되었을 무렵의 하교길이었다. 누구인지 왜인지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그는 심한 놀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를 낯설어했고 경계했다. 그의 고향이 서울이었므로 오랫동안 그 텃세가 도심지에서 이사 온 아이에 대한 시기나 질투,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서울이란 곳을 떠나온 지가 아무리 못해도 5,6년은 되었을 무렵이었다.

작은 섬이었지만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섬이라 동네와 동네를 잇는 산은 높이가 있었고 그래서 마을 간의 이동은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는 아이들 간에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 섬에 막 도착해서 살았던 동네와 학교를 다닐 무렵의 동네는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그 동네에서는 이방인이었고 낯선 존재였으며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는 매일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바지에다 똥을 산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놀림은 아이들이 성적에 눈 뜨고 또 그가 공부에 눈을 뜨게 되는 날 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그 놀림이 아주 끝나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아이들은 무리를 짓게 마련이고 그 무리에는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가 생기게 되는 법이다. 사실 이것은 비단 아이들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람이 존재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이상은 마치 이 땅의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그 작은 섬, 그리고 또 더 작은 그 마을에도 이 법칙은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어서 친구 길우와 그 형이 그 동네에서는 보이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살던 마을은 다리 두개를 통해 이어진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작은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앞산을 조금 가로 질러 올라가면 생기는 평지를 두고 드문 드문 집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또 하나 있었고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높다란 산까지 이어지는 시내를 따라 또 하나의 작은 부락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기억으로는 이 모두가 하나의 마을로 불리지 않았나 싶다. 바다와 화산으로 이루어진 분지, 그리고 비탈을 깍아 만든 밭이 마을 사람들의 생계 터전이었는데 그가 아주 어린 시절 이 곳으로 이사 온 아버지는 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옷 장사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자잘한 이질감이 그러한 작은 고난의 어떤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그 마을의 무리에서 약간은 비켜선 주변인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길우의 형이 어느 날 오후 자기 집 앞 마당으로 그를 불렀다.

그가 그 집 앞 마당 근처의 골목길로 갔을 때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길우, 그리고 길우의 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고 불려간 그에게 권투 장갑을 내밀었다. 이 형제들은 어찌나 호기심으로 충만한지 어디선가 구한 발명에 관한 책을 보고 손수 솜사탕 기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비록 솜사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호기심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전등 타이머를 개발하거나 아무튼 일일이 기억할 수조차 없는 자잘한 발명품들을 곧잘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나 그날의 호기심은 그러한 발명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과연 그가 얼마나 이 무리 속에서 약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그런 실험의 시간이었다.

그가 권투 장갑을 들고 영문을 몰라 하자 무리 속에서 갸름한 곱쓸머리 하나가 권투 장갑의 줄을 희고 고르게 드러난 이로 묶으며 등장했다. 나름 강인한 인상을 주려는 듯 그 작고 단단한 이빨로 장갑끈을 묶어 매며 치켜 뜬 눈에서는 아주 기분 나쁜 미소가 언뜻 언뜻 비쳤다. 그는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나이도 한 살 어렸고 아주 큰 덩치도 아니었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빠르게 대처하는, 그리고 강자와 약자를 본능적으로 인지하는 그 아이 앞에서 그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무리를 둘러싼 모든 아이들이 한참 동안 웃어재꼈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우주 속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동생에게 맞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장면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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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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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질식

습작 2008. 4. 17. 23:51
그 일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 빛과 소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단 1초도 되지 않아 어둠과 침묵 속에 깊이 잠겨버렸다. 또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비로소 그의 눈 앞에 짙은 푸른색으로 채워진 낯선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달무리처럼 희끄무레한 빛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몽환적인 일렁임으로 가득한 달리의 유화를 닮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선명한 어떤 색의 배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그것은 햇빛으로 가득한 해변에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앞을 가릴 때 느꼈던 답답함과 닮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어두움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곧 그가 지금 바닷물 속에 빠져 있으며 남들처럼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넋 나간 듯 물 속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런데 전혀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인식만큼은 무서우리만치 또렷했다. 그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그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언젠가 물에 빠지고도 허우적대지 않으면 그만큼 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경우가 그랬지만 아예 지금처럼 넋을 놓은 상태라면 허우적대다 죽는 것과 매 일반일 것이다.

죽는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보다 아쉬움 쪽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쟎아. 나는 푸념도 원망도 아닌 주절거림을 속으로 삭이면서도 이상스러울만치 편안한 느낌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편안했다. 책이나 TV, 영화속에서 나오는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과는 분명히 달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의외로 편안했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사실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당시 그는 약간의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질식과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의 정신적인 충격이 그를 덮친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하리만큼 그의 의식은 또렷했다. 이 모든 일은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10초도 이어지지 않은 짧은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곧 그의 몸은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고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가 배들을 해안의 자갈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듬어진 통나무를 잡고 헤엄 비슷한 것을 치고 있었고, 그 통나무가 갑자기 팽그르 도는 바람에 그가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던 것이다. 다행히 바다가 땅만큼 익숙한 동네 아이들, 형들 속에서 그 일이 벌어졌고 형들 중 하나가 그의 머리를 잡고 냉큼 끌어올리면서 곧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아주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도 먼 발치서 이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그다지 심각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물에 빠졌지만 곧, 정말이지 아주 금새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고 바다와 접해 사는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상이었다. 모두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바다와 친해졌고 또한 자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만큼은 그 순간 성장이 멈추어버렸다. 적어도 두려움에 대한 그의 내성은 그 때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물 속에 있었던 그 순간보다 사실 물 밖으로 나와 그 장면을 회상하는 두려움이 그에겐 더 컸다. 그는 이후로 수영을 하지 못했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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