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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12 홍어

홍어

책읽기 2006. 9. 12. 13:56



홍어
김주영/ 문이당

눈덮힌 고즈넉한 시골마을에 어머니와 아들 둘이 살고 있다.
매운 손끝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바람 나 떠난 아버지의 빈곳을 메우고 있지만 더 이상의 절망도 없어보이는 삶을 어렵사리 고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눈오던 날 '삼례'라는 처녀가 집 부엌으로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는 이 집과 마을을 크게 떠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왔다 떠나면 그 사람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왔다가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어머니와 아들, 또다른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이 책의 절반을 넘기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지루하지가 않다.

진짜 칼싸움의 고수들은 단 1합도 겨루지 않은채 상대의 빈곳을 찾아 정적과 싸운다.
그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 칼이 부딪히는 것보다 더 처절한 법이다.
동네 여자와 바람이 난 집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어머니,
그녀는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 독자들을 자신의 이 싸움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여놓고는 혼자 소리없이 사라져버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에 얼이 반쯤 빠져서 소설 앞장을 자꾸 뒤적이게 된다.
졸면서 읽었거나 건너뛰어 읽은 건 아닌가 확인해보는 것이다.

확실히 소설의 구성과 진행은 동서양이 다르다.
빈곳을 참지 못하며 채우려 드는 서양 소설들에 비해
김주영과 같은 우리나라 소설가들의 글은 마치 여백으로 가득한 수묵화를 바라보는 듯 하다.
글자만을 쫓아가선 안된다.
소설의 여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이 책은 한없이 지겨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여백을 제대로 짚어가기 시작하면 어떤 추리소설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다.

어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다가 이 여백들에 숨어있는 한없이 많은 이야기들에 넋이 빠진 경험이 있는지라 이 리뷰를 쓰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숱한 싸움과 화해 갈등을 쫓아가다보면 다른 이들을 조금은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것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 이 소설속으로 빠져들어가 생각해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진리다.

문제는 누가 이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는가이다.
이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의 할아버지였고, 할머니였고, 또 아버지,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게 더 가슴아프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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