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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16 파버카스텔 UFO 퍼펙트펜슬 브라운 4


마지막으로 연필을 써 본 지가 과연 언제였을까?
기억의 끝자락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연필보다는 샤프 펜슬이 먼저 잡힌다.
제도 샤프가 가장 흔했고 중학교 무렵엔 흔들어 샤프의 대유행이 있었으나 잠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무엇으로 쓰는가가 중요하지 않았다(오직 성적이 중요했다).
펜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을 파고들면서 연필과 펜을 떠나 뭔가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어져버렸다.
그래서 책상에서 이 연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정말로 이 '연필'이란 것이 신기해서 한참을 만져보았다.

파버 카스텔,
무려 250년의 역사를 가진 회사다.
구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육각형 연필을 최초로 만들었으며, 필기구의 브랜드화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HB, 2B와 같은 연필의 규격을 스스로 표준화했고 지금은 세계 표준이 되었다.
연간 20억 개 이상의 연필과 색연필을 생산하며 120여 개국에 수출한다.
2009년 매출만 4억 5천만 유로에 달한다.
한 마디로 ‘연필의 원형’이라 할 만한 회사다.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테디셀러 카스텔 9000 역시 낱개 가격이 1000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하나의 명품을 만날 수 있는 제품군이 연필 말고 또 있을까?
호기심으로 아들이 가지고 다니는 동아연필, 문화연필도 함께 깎았다.
연필업계의 양대 브랜드로 알려진 스태들러와 톰보우도 함께 샀다.
녹색의 파버, 파란색의 스태들러, 검은색의 톰보우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동아연필... 흠.

나름 키보드의 키감에 민감한 편이다.
‘타닥’거리는 키감에 반해 가격 대비 성능에 의문을 품은 채로 소니 노트북을 오랫동안 써왔다.
중국산으로 전락한 씽크패드를 고민 끝에 회사 노트북으로 결정한 것도 바로 그 ‘쫀득쫀득’하다는 키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번 써보면 이들 연필의 미묘한 필기감을 구분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파버 카스텔은 카스텔 9000 말고도 보난자를 골랐다.
스테들러는 노리스와 마스 루모그라프가 유명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나름 연필계의 스테디셀러이자 명품으로 불리는 애들이었다.
일본연필의 대표모델은 톰보우의 모노J,
그런데 동아연필은 모델명을 읽고 순간 놀랐다.
‘** 태권도’
한 번 더 읽어보고서야 태권도장에서 나눠준 공짜 연필임을 알았다.
문화는 ‘더존’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 그리고 상당히 많은 글을 써보았다.
손목이 아파질 때까지.
과연 최고의 연필은 어떤 녀석이었을까?

솔직히 나는 너무 물러서 버터로 불린다는 일본연필 톰보우가 싫었다.
같은 HB인데도 카스텔 9000은 지나치게 단단해 흐린 글씨가 이어졌다.
놀랍게도 내가 기대한 ‘사각거림’을 보여준 연필은 다름 아닌 태권도 연필, ‘동아연필’이었다.

결코 작위적인 설정이나 반전을 기대하고 이렇게 쓴게 아니다.
진심으로 나는 동아연필의 거친 필기감이 마음에 들었다.
(파버 카스텔의 회장이 연필의 물성은 원래 거칠다고 두둔했던 기사가 떠올랐다)
100년 전통, 250년의 역사, 연필의 원형 따위는 그저 역사일 따름이다.
연필은 그저 연필이지 브랜드란 이름으로 압도적인 필기감을 기대한 내가 어리섞었는지 모른다.
물론 카스텔 9000은 그 특별한 작업 공정으로 2,3배에 이르는 필기거리와 부러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
톰보우는 세제곱 밀리미터당 100억개에 달하는 입자로 전문가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연필이 되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는 이상 수퍼카가 필요하지 않듯이 연필은 그저 연필 본연의 임무만 다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적당한 품질, 저렴한 가격으로 글씨만 쓸 수 있다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우리나라 문구 시장은 현재 거의 고사 상태다.
필기구 매장의 대부분은 일본 펜들이 차지하고 있고, 독일 브랜드들은 저마다의 별도 매장을 가지고 손님을 맞는다.
국산 연필의 품질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는 평이고, 맏형 격인 동아연필은 IMF를 지나면서 그나마 국내 시장의 70%를 잃은 경험이 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국산 브랜드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연필을 만드는 공정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연필은 연필일 뿐이다.
국산 연필이 오로지 떨어지는 품질 때문에 이런 현실을 맞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답은 어떨까?
독일과 일본 연필들은 ‘브랜드’가 되었지만 국산 연필은 여전히 그저 ‘연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연필이 연필인 것이 무슨 죄일까?
하지만 브랜드가 된 연필은 85만 원에 팔리지만 그렇지 않은 연필은 1000원을 받기 힘들다.
브랜드가 된 연필은 스스로를 ‘창조성의 도구’로 미화하지만 연필을 만드는 사장님은 몇 백원짜리 연필을 만들고 있다며 스스로를 푸념한다.
그리고 이 위치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네이버 캐스트에 오른 윤광준 씨의 ‘파버 카스텔에 관한 글’에 수 백개의 덧글이 달렸다.
많은 이들이 수십 만원짜리 연필에 대한 저자의 감동을 물신화에 빠졌다며 성토하고 있었다.
혹자는 비싼 펜이 사람의 품격을 만들지 않는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산 연필이 외국에 수십 만원의 가격을 팔린다 해도 여전히 같은 비난을 할까?
비난하는 그들은 가격 대비 성능에 만족하며 명품백을 외면할까?
수십 만원짜리 노스 페이스 잠바를 절대로 입지 않을까?

좋은 브랜드는 기술과 전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브랜드는 만드는 이의 고집과 철학에 의해 시작되지만,
정말로 꽃을 피우는 것은 그것을 쓰는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아줄 때이다.
250년 파버 카스텔의 역사는 어쩌면 이것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장인에 대한 예우가 유난히 깍듯한 독일과 일본에서 최고의 자동차와 연필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버카스텔 UFO 퍼펙트펜슬 브라운,
첫 째의 책상에서 몰래 가져온 4만원 짜리 이 연필의 필기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이까지 짧아 훨씬 더 빨리 닳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연필을 쓰는 순간만큼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동아가, 문화가 이런 경험을 외국 친구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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