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소담출판사

* 숨을 헐떡이며 이층으로 올라가니까 민준이 언제나처럼 작은 문고판 책을 얼굴 가까에 들고 읽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한 시간에서 이십오 분이나 지나 있었다.

내 자신이 싫어지는 때가 이런 때다. 늘 하던 실수를 늘 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심지어 그것에 뻔뻔해지지도 못할 때, 하지만 다음번에 그 순간이 온대도 내가 결국은 그 실수를 또 하고야 말 거라는 걸 알때.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결심을 하거나 구호를 한 달쯤 외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거나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늘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의 결점들을 그렇게 보게 될 때. 그리고 내가 고작 거기까지의 인간이라는 걸 그래서 또 깨닫게 될 때. 85p.

* 지쿠로안에서 차를 마시며 아버지는 시즈코와 조용조용히 말을 나누었다. 별말도 아니었다. 말은 자주 끊겼고 가끔 시즈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버지가 아빠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로 보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버지는 시즈코와 같이 있을 때 더 남자다웠고, 엄마와 함께였을 때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다. 그리고 이건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냥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 같았다. 그 무렵 정체서으이 혼란 없이 내가 두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 내가 하나의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을까. 184.

* "홍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홍이의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만 누군가가 홍이를 한국인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겠지."

거꾸로 이야기해서 준고가 일본인인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본인이라고 해서 네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 잘못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반대하신 건가요?"
시즈코는 조용히 웃었다.
"우리 아버지를 용서하실 수 있었어요?"
시즈코는 조용히 웃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사랑하시나요? 세상에 그런 사랑이 있는 건가요?"
얼굴이 잠깐 어두워지더니 시즈코는 그냥 조용히 웃었다. 184,5p.

* 그후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평소에 나는 그런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웬 역사 의식? 웬 애국심? 하고 웃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 나의 존재가 가장 예민했던 바로 그 순간,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그렇게 어이없는 종말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어 주고 있었다.
참으로 비겁하고 훌륭한 명분이었다. 206p.

* "나는 갈래. 고향으로 가고 싶어. 여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거기가 좋아서. 큰 소리로 싸움도 잘하고, 큰 소리로 화해도 잘하고, 큰 소리로 웃기고 잘하고, 큰 소리로 울기도 잘하는 모두가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는 내 나라고 가고 싶어. 물어보지 않아도 김치도 더 주고, 노란 무도 더 주고 배고프다고 하면 밥도 한 그릇 더 주는 내 나라로 가고 싶어. 거기는 모두가 우리니까. 그리고 나는 별로 조용조용한 사람이 아니거든." 208p.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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