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혁,
나이는 일곱살, 어린 나이에 벌써 한자 6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똑똑한 친구,
하지만 까무잡잡한 외모 때문에 초등학교 생활이 걱정스럽다는 보모?의 걱정과 함께 우리 집으로 온다.
이름하여 '가정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랫동안의 약속이었던 '컴패션'에 제대로 등록하기가 무섭게 와이프가 일을 저질렀다.
보육원아들을 초청해서 4박 5일동안 가족과 가정에 대한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에 덜컥 신청해버린 것이다.
귀챦았냐고?
아니다. 한편으로는 와이프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애 둘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삭을대로 삭아버린 사람이 도무지 무슨 베짱으로 그런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으나 그 얘기를 하는 와이프의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음을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만 숨쉬고 먹고 자는 것만을 말하진 않는다.
각설하고...
그런데 우리 가정을 체험한다고?
이 프로그램을 위한 오디션에 다녀온 아내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 없이 자란 아이다.
어줍쟎은 동정심으로 대했다가는 오히려 씻을 수 없는 상채기 하나를 더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경험했는지 오디션 내용도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먼 친척이라고 말하라.
평생 함께 하자는 둥의 동정어린, 그러나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절대 하지 마라.
엄마라고 부르게 하지 마라, 그저 샘물이모 정도로 부르게 하라...
아내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잔혹극'이라는 표현을 썼다.
인생이란게 원래 그런 면이 있지만서도 이 어린 아이들이 맞딱뜨려야 하는 세상은 그 나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나도 지울 수 없다.
서로 서로 지킬 것에 대한 매뉴얼을 하나씩 들고 우리 가정과 그 아이가 만난다.
얼마만큼 주어야 하고 얼마만큼 사랑해야할 지에 대해 자로 잰듯한 공식 몇 개를 가지고...
그 자체가 '잔혹극'이지 않은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데 매우 느리다고 한다.
상대방이 화를 내는지, 기뻐하는지, 어색해 하는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잘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육아'라는 것이 단지 먹이고 재우는 것 이상의 거대한 무언가를 포함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가정'이라는 것이 단지 먹고 자고 쉬기 위한 장소의 개념 이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좀 더 필요한 시기가 따로 있다.
어쩌면 민혁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인데 우리 부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적다.
다만 욕심내지 않고
그 4박 5일동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저 그렇게 기도할 뿐이다.
나이는 일곱살, 어린 나이에 벌써 한자 6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똑똑한 친구,
하지만 까무잡잡한 외모 때문에 초등학교 생활이 걱정스럽다는 보모?의 걱정과 함께 우리 집으로 온다.
이름하여 '가정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랫동안의 약속이었던 '컴패션'에 제대로 등록하기가 무섭게 와이프가 일을 저질렀다.
보육원아들을 초청해서 4박 5일동안 가족과 가정에 대한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에 덜컥 신청해버린 것이다.
귀챦았냐고?
아니다. 한편으로는 와이프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애 둘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삭을대로 삭아버린 사람이 도무지 무슨 베짱으로 그런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으나 그 얘기를 하는 와이프의 눈빛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음을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만 숨쉬고 먹고 자는 것만을 말하진 않는다.
각설하고...
그런데 우리 가정을 체험한다고?
이 프로그램을 위한 오디션에 다녀온 아내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 없이 자란 아이다.
어줍쟎은 동정심으로 대했다가는 오히려 씻을 수 없는 상채기 하나를 더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경험했는지 오디션 내용도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먼 친척이라고 말하라.
평생 함께 하자는 둥의 동정어린, 그러나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절대 하지 마라.
엄마라고 부르게 하지 마라, 그저 샘물이모 정도로 부르게 하라...
아내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잔혹극'이라는 표현을 썼다.
인생이란게 원래 그런 면이 있지만서도 이 어린 아이들이 맞딱뜨려야 하는 세상은 그 나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나도 지울 수 없다.
서로 서로 지킬 것에 대한 매뉴얼을 하나씩 들고 우리 가정과 그 아이가 만난다.
얼마만큼 주어야 하고 얼마만큼 사랑해야할 지에 대해 자로 잰듯한 공식 몇 개를 가지고...
그 자체가 '잔혹극'이지 않은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데 매우 느리다고 한다.
상대방이 화를 내는지, 기뻐하는지, 어색해 하는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잘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육아'라는 것이 단지 먹이고 재우는 것 이상의 거대한 무언가를 포함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가정'이라는 것이 단지 먹고 자고 쉬기 위한 장소의 개념 이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좀 더 필요한 시기가 따로 있다.
어쩌면 민혁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인데 우리 부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적다.
다만 욕심내지 않고
그 4박 5일동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저 그렇게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