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창사 3주년 기념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절대 볼 일이 없었을 영화를 보았다. '레터스 투 줄리엣'. 두 개의 영화 중 한 시간 빨리 끝난다는 이유로 선택한 영화인데 (감독에겐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영화가 던진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포도 농장과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풍경은 아무리 영화라지만 실사보다는 이미지에 너무 가까워 결과적으로 내 생각을 끄적일 엽서나 노트 표지같은 느낌을 주었고, 여주인공이 등장한 몇 신은 내가 '영화를 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환기시켜주곤 했다.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는 뻔하고 식상하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란게 어차피 그렇지 않은가. 그 식상함을 '무엇'으로 포장해내는가가 가장 중요한 차별화 포인트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주인공의 연기(할머니를 포함해서)와 풍경에 많이 기댄 영화다. 하지만 도입부의 단 한마디 대사에 나는 영화에 금새 빠져들 수 있었는데 주인공의 직업이 '뉴요커'지의 자료 조사원이다. '뉴요커'... 영어공부를 등한시한 것을 후회할 때가 종종 오는데 그 중 하나가 '뉴요커'지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서점에서 새삼 깨달을 때다. '뉴요커'가 어떤 잡지인가. 바로 말콤 글래드웰이 기고하는 최고 수준의 교양지? 아닌가. 영화 주인공은 그런 작가를 꿈꾸는 자료 조사원이다. 그런 그녀가 허니문(을 빙자한 밀월 여행)을 떠나면서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면 답장을 해주는 이탈리아의 한 마을을 방문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울산에도 등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엽서를 쓰는 어떤 곳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번 추석 때 갔다왔는데... 이건 좀 심한걸...)

혹 당신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어떤 일이나 직업이 있는가? 나의 경우는 있다. 이른바 '심층보도' 기사를 쓰며 자유롭게 여행하며 살아가는 전업작가다. 따귀 맞기 딱 좋은 고백이지만 사실이다. 아주 흥미로운 단서 하나를 발견하고, 때로는 자료조사원이 되어 사설탐정처럼 진실의 꼬리를 따라가다 가벼운?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텔방이나 노천 카페에 앉아 방금 본 것들을 행여 놓칠새라 몰스킨을 끄적이거나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는... 나는 정말로 그런 일을 하는 나를 꿈꾸었었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에는 뉴요커같은 잡지가 거의 없고, 설혹 있다 하더라도 심층 기사 취재를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일단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글을 써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빌어먹을' 일이다. 그대가 김훈이나 이외수 정도의 독특한 필력을 가지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자신의 한평생 정도는 책임질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을 쫓는다'란 영화적 설정이 '영화처럼' 보이는 것처럼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비슷한 의미에서 판타지적이다. 서른 중반을 넘기면서 느끼는 가장 큰 절박함은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순간이다. 적어도 20대 때는 그런 꿈이라도 꾸며 '방황'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방황조차도 서른이 넘어가면 고스란히 부담으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쓰는 글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지 조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은 어느 순간 크게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 글을 얼마나 가슴 벅차하며 썼는지에 더 끌릴 때가 있다. 그것이 꼭 감상적인 에세이나 소설일 필요는 없다. 나는 논문 한 편에서도 그 발견과 발명의 기쁨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순간의 떨림'을 간직한 글을 만날 때마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종종 가슴 뿌듯해한다. 그건 모래 바람 속에서 가끔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신기루같다. 하지만 그 신기루가 신기루일까봐 가슴앓이를 겪는다. 다다르고 싶은 갈망이 클수록 현실의 벽은 높고, 그 벽을 넘기 위해서는 종종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선택의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속 사랑은 영화처럼 이루어졌다. 영화속 주인공이 쓴 글은 뉴요커지에 당당히 실리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러나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싶어하는지는 오히려 더욱 모호해졌다. 내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정말로 이제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알량한 글쓰기 재주를 넘어 한 순간마이라도 읽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할 수 있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원고마감이 오늘이고 코 앞인데, 나는 이런 글이나 쓰고 있고...
10월 중순을 넘긴 가을은 창을 넘어 더운 공기를 뿜어내고 있다.
갑자기 노트북 타자 위에서 멜랑콜리한 냄새가 나서 버스터미널 코앞의 패스트 푸드처럼 약간 역겨워진다.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젠장...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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