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에 대자보 하나가 붙었다.
대자보의 제목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명문대,
그것도 최고 인기학과의 학생이 자퇴를 하면서 남긴 파장은 적지 않았다.
수많은 언론이 이 대자보를 기사로 올리며 사회적인 공감과 자성의 소리들을 불러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것은 그다지 많아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치열한 경쟁의 맨앞을 달리던 이들이 보내오는 비보다.
죽을 힘을 다해 성공의 정점에 다달았던 이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막다른 골목에 막혀 절망을 말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고,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날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
15살(우리나라로 치면 중2다) 독일 소녀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엇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지를 토론을 통해 배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거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다양한 것이요. 얼마 전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이라든지, 인종차별이라든지, 환경문제라든지요. 아, 전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작년에 교환학생으로 이스라엘에 다녀왔었거든요. 그저 남의 나라의 민족 간 분쟁이 아니라 당장 나와도 관계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교환학생으로 있는 동안 생각하게 됐어요.”
오래 전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애벌레들도 다른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꼭대기에서 마주한 현실은 처참하다.
“야!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 바보야 조용히 해, 저 아래서 듣잖아.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하는 곳이 바로 여기야.”
줄무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올라온 것이 헛일이라니! 아래서 볼 때만 굉장해 보였구나.’
그러나 몇몇 애벌레들은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고치가 된 그들은 결국 나비가 된다.
명문대를 포기한 대학생 김예슬의 선택은
과연 나비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치열한 삶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 관련기사
3월이면 생각나는 그녀의 용기, <김예슬 선언> 5년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몰락하는 중산층 10장면
2년 전까지만 해도 A씨(55세)는 중견 금융회사의 부장급 간부였다. 상류층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중산층은 된다고 자부했다. 퇴직 후 눈을 낮추면 소소한 일자리는 있겠지 싶었지만, 현실은 전쟁터였다. 재취업은 불가능했다. 중소기업 재무담당 경력채용 공고가 나오면 경쟁률이 금방 수백대 1을 넘었다. 2년여 백수생활 끝에 A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더 이상 놀 수는 없지 않소. 앞으로 살 날이 얼만데…”
독일 15세 소녀의 일침… 한국 중학생이 보면 열받겠죠?, <오마이뉴스>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중요해. 머리가 똑똑한 것이 나무로 의자를 잘 만든다거나 기계를 잘 고친다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다른 것뿐이잖아.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면 그만큼 따분한 세상이 어디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