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혹시나 하고 긴장하면서 교회앞으로 갔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조그마한 교회 앞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하는가... 솔직히 궁금했습니다.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은 많이 보았지만 사실 그 글들은 온전한 대화와는 또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 그들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제 지구촌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어버린 샘물교회에 다니고 그들이 계란을 던지기 위해 달려온 그 목사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나는 지금 샘물교회 앞에 와 있습니다.
지옥같이 길었던 40여일간의 납치극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크리스천들, 특히 저같은 샘물교회 신자들은 어쩌면 전혀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만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앙에 대한 회의는 아닙니다. 바로 이 땅위에서 온전한 교회와 크리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그것입니다. 사실 스스로가 이렇게 남으로부터 '완전하게' 미움받고 외면당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성찰로 이끌리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2.
어떻게 보면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 갔다는 사실이 이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렇게 오랫동안 평범한 국민들에게 소리없이 깊은 상채기를 남긴 대한민국 크리스천들에 대한 준엄한 판단이자 저항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그 뜻을 따르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미워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아집과 자기만족을 전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흔히들 쉽게 대형교회를 욕하지만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 대형교회가 가진 욕심과 교만과 얼마나 다르게 보일지는 미지수입니다. 하나님께 말입니다.
우리는 줄을 탑니다. '왕의 남자'에 나오는 공길이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줄이 위험해보이자 그 줄을 땅위에 내려놓아버렸습니다. 이제 올곧게 줄 위에 머물지 않아도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 그러나 마치 줄을 타는 것처럼 온갖 재주를 다 넘어보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쉽게 거짓말 합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때로 목숨까지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또 숱하게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신앙'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핏 무가치하고 무의미해보이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폐암 수술을 여러번 하신 옥한흠 목사님이 강단에 서셨습니다. 설교를 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박목사님의 고집에 꺾여 샘물교회 강단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게 칭찬과 부러움을 받는 삶을 원하는가? 그것은 가짜다. 복음이란 애시당초 세상의 부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우리가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런 삶은 포기하라. 성경에 쓰인대로 살라. 내려놓는 삶을 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는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 것 같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진정한 인생에 대해 수없이도 고민했을 노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보면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요구하는 그 분이 밉다기보다는 그 진정성에 마음이 움직였던게 사실입니다.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의미에서 옥목사님이 다시 부러워졌습니다.
3.
박목사님은 다시 기도원으로 쫓기듯 올라가셨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 분의 설교를 들었고, 또한 그대로 살려고 애써왔던 게 사실입니다. 대부분 실패한 삶이었지만 그다지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신의 설교대로 살려고 했던 박목사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저는 보아서, 그리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편견을 조금만 내려놓고 본다면 인간 박은조는 아무나 그렇게 돌을 던질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도 이 세상의 저울대 앞에서는 파렴치한 부자동네 목사일 따름이고 몇몇 악플러들에게는 또 다른 이름의 세상악일 뿐입니다.
담임목사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 일찌감치 교회 전 사역자들의 임금을 평준화했고 가족수에 따라 차등을 주는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꾀한 것이 박은조 목사입니다. 잘 나가던 서울 대형교회를 버리고 개척을 한 사실도 그렇고, 또 그 개척한 교회를 또 쪼개어 독립하게 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장난감 하나도 빼앗기기 싫은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욕심의 종류와 강도가 더 높아지는게 인지상정이지만 박목사님은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입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보다는 자라나는 2세들의 기독교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온 것도 그러한 비범한 선택의 한가지 예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평탄하고 드넓은 욕심의 길을 피해 좁은 길을 따라갔더니 온갖 세상의 조롱과 멸시가 기다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제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인 것입니다.
4.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곧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참되고 바르고 착하며 욕 안먹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해도(그건 요즘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며 미련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잠시만 초점을 바꾸어 '완전한 기독교'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어쩌면 비난하는 그들도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용서를 구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혹은 '개독교'라 불리는 오늘날의 비판에 고개 숙입니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더할 수 없는 걱정을 끼친 일,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월등하다 하며 교만했던 일(참된 크리스천들에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삶은 결코 교만할 수 없기에), 이웃의 아픔보다 교회안의 교제와 부유함에 함몰되어 있었던 것,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철저히 등 돌릴 때까지 제대로 된 회개와 겸손에 대해 그렇게도 무감각했던 일...
그래서 더 열심히 믿으려 합니다. 성경과 그 속의 하나님이 온전히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더 담대히 전하기 위해서라도...
아마도 그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며 길고도 긴 여정이 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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