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수고

완벽한 하루 2006. 10. 27. 09:48

얼마전에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니는 은행으로부터 카드 할당량 50장이 내려왔으니 도와달라는 거였다. 여느집과는 반대로 6살이나 어린 동생은 나보다 상당히 과묵한 편이라 은행 다닌지 10여년이 되었지만 한번도 개인적인 부탁을 해온 적이 없다. 더구나 다니던 은행이 최근에 완전 합병되었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카드라... 개인적으로 마구잡이식 카드발행에 분노까지 했던 내가 아닌가. 누군가의 부탁으로 카드를 만들어본 적은 더더욱 없는터라 매일 얼굴보고 일하는 동료들에게 카드신청서를 내밀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점심시간에 그래도 맘놓고 말할 수 있는 몇분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내봤으나 하나같이 카드와는 연을 끊은지 오래라고 하도 단호하게 말들을 하는 바람에 내 낙담은 거의 절망에 가까워졌다. 한두장 받은 신청서를 들고 동생에게 도저히 안되겠다고 전화를 하고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오후근무를 시작하면서 생각해보니 욕먹을 셈 치고 한번 전체 메시지나 날려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걔중에는 진짜 카드가 필요한 사람도 있을테고, 동생과 합의를 본 도서상품권을 미끼 삼아 얘기라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거의 15명에 가까운 동료들이 카드 신청서를 작성해줬다. '절대' 안만들기로 작정을 한 사람이 카드를 만들어주는가 하면, 어떤 분은 이미 같은 은행의 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지하고 가입해도 되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사장님까지 가입을 받아 어제 오후 택배로 동생에게 보낼 수 있었다.

끝난 일이어서 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도 작은 일은 아니었다. 일일이 신청을 요청하고 받고 빠진 항목 확인하고, 결국엔 날짜가 촉박해서 과연 하루만에 택배로 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경리를 보는 한 동료는 자신만이 아는 비법을 몰래 알려줘서 무사히 미션을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업무에도 자잘한 방해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도운건 꼭 피붙이라서 그런것만은 아니었다.

지난주에 집을 계약했을 때가 토요일이었는데 그날 계약금의 일부인 400만원을 입금하기로 했다. 통장에 돈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 뱅킹으로 입금하기로 약속을 하고 왔는데 아뿔사, 하루 이체 한도액이 정해져 있어서 돈을 보낼 수가 없다. 급한대로 생각난게 역시 동생이었는데 그날 동생은 그 400만원을 메우기 위해 소중한 주말저녁을 몽땅 바쳐야 했다. 자칫하면 며칠을 발품팔아 찾아낸 소중한 집을 날릴뻔 했는데(주인은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집을 얻으려는 우리를 가뜩이나 마뜩챦아 했다) 동생이 자신의 수고를 다해 도와준 것이다. 자잘한 집안사이니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동생은 여러번 내게 이런 도움을 주었었다. 은행에 다닌다는 죄아닌 죄로 말이다^^

수고는 수고를 낳는다. 이것은 행복한 수고다. 나를 믿고 필요치도 않은 카드를 개설해준 동료들의 수고에 비하면 나와 동생의 수고들은 너무나 사소해도 말할 필요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은 바로 이런 사소하지만 행복한 수고들로 인해 샘솟는 것이 아닐까. 나와 동생을 도와준 회사동료들이게, 그리고 나를 도와준 동생에게 작지만 성의가 담긴 수고들을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행복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인 듯 보이지만 그것들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또 증폭시키는 힘들은 대개 어울려 살아가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들로부터 나온다. 더구나 이것은 학교에서는 결코 가르치지도 배울 수도 없는 것들이다. 오로지 하루하루를 진실되게 열심히 살아가면서만 배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또 한가지를 배운 것이다.
이것이 진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 어제 저녁 메뉴로 나온 두부 스테이크, 와이프가 요즘 요리 블로그, 사이트를 섭렵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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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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