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황장애

습작 2008. 4. 17. 23:49

의사는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기다리고 있는 환자의 인기척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밖에 있는 간호사와는 컴퓨터를 통해, 그것도 약간의 곁눈질과 마우스 클릭으로 이 상황이 통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는 아마도 이 환자에게 있어 첫 공식적인 진단이 줄 충격을 완화시킬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몇 가지의 질문을 통해 그는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병명이 맞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적인 위험이 없는 데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 신기한 병, 혹은 증상이 과연 어떠한 이유로 그의 몸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관해 의사에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참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그것들이 이제는 몸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몸 곳곳에 수 없이 많은 안테나를 세워두고서 몸 안과 몸 밖의 모든 신호들을 필요이상으로 과다하게 수신하고 있었다. 공황장애는 그런 병이었다. 대개의 경우 단순한 어지럼증 정도로 시작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죽거나 미치거나 자제력을 잃을 것 같은 공포감과 함께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병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공황발작이라고 불렀다.

몇달 전 그에게 이러한 증상이 찾아왔었다. 피곤한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지하철 안이었다. 갑자기 숨 막힐 듯한 공포와 어지러움이 그를 엄습해왔다. 너무도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일단 열차를 빠져나와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하의 탁한 공기가 마치 그의 목을 옥죄는 듯 한 공포감을 불러오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초가을의 찬바람이 지나다니는 차들과 함께 가볍게 요동치는 지상으로 빠져나왔을 때도 그의 심장은 가쁘게 뛰고 있었다. 좀체 안정이 되질 않았다. 그는 가까운 약국에 가서 증세를 설명했고 약사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 듯 익숙하고 확신에 찬 손놀림으로 병으로 된 약 하나를 꺼내주었다. 액체로 된 우황청심원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공포감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온갖 생각과 걱정이 텅 빈 머리와 가슴속으로 다시 밀려들었다. 앉아 있어도 누워 있어도 세상이 흔들렸다. 아니 내 머리가 실제로 흔들리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몸 전체가 중심을 못잡고 있는 것처럼도 여겨졌다. 그것은 곧장 불안감으로 이어져 그야말로 좌불안석 안절부절 의자위에서 들썩거렸다. 그는 공황장애에 대해 설명한 인터넷 사전의 설명을 떠올렸다.

공황장애란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종의 투쟁·도피반응이다. 문제는 실제적인 위험대상이 없는 데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데 있다. 죽거나 미치거나 자제력을 잃을 것 같은 공포감이 동반된다. 대개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에 대해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위험 상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비교적 높은 유병률, 만성적인 경향, 재발, 삶의 질과 사회적 기능의 장애, 내과적 질환에까지 이환될 가능성의 증가, 자살로 인한 사망률 증가와 관련이 있다.

그가 공황장애가 맞죠?라고 물었을 때 의사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써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할 예의 그 훈련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의사는 인터넷의 온갖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고, 그것도 관련 카페 동호회에 가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의사에게 그 병에 관한 모든 정보를 샅샅히 훑고 왔을 환자의 이력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익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무분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사란 단순히 예정된 약의 처방을 근엄하게 지시하는 역할만을 해야 하는가라는 약간의 짜증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의사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확인만 거치고 그 후로는 의사의 진단과 조언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한 대응이 효과가 있었는지 의사는 사람의 온갖 장기로 연결된 전문적인 뇌의 그림을 그에게 펼쳐 보이며 이 공황장애란 병이 가진 비밀 아닌 비밀을 익숙하게 풀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은 이 병원에 오기까지의 여러 가지 학습을 통해 섭렵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혹시 자신의 표정에 잠깐이라도 지루함이 내비칠까 신경을 써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때 의사는 또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공황장애란 자신의 위험을 항시적인 긴장을 통해 인지해야만 했던 원시시대의 동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공황장애가 음식을 먹을 때 특히 심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죠.”
그는 식사할 때마다 유난스럽게 주위가 흔들렸던 경험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죠. 안전해진 겁니다. 그래서 위험을 인지하는 안테나의 숫자가 줄
어든 겁니다. 그러나 공황장애 환자는 다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주변을 의식하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야생의 동물들처럼 평상시에도 위험을 감지하는 안테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항상 켜두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교감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교감신경항상이라고 부르죠.  이 상태가 심해지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인 ‘공황발작’이 발발합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도 일생의 한두번은 이러한 공황발작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공황장애라고 부릅니다.”

의사는 이 말끝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환자의 눈을 살폈다. 그리고 이러한 의학적인 설명보다는 이 환자에 대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부쩍 늘어나는 이 병에 대한 임상적인 호기심이 토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달래줄 것이라는 작은 기대도 있었다. 그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든 정신과 치료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는 대기 중인 환자를 돌려보낼 것을 지시하고 이 토요일 오후 마지막 환자에게로 다시 돌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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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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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학원 일자리를 알아본다고 한다.
주 3일 수업인데 내 연봉을 가뿐히 넘는 모양이다. (참고로 내가 사는 곳은 분당이다.)
생각이 복잡해져 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얼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제약회사에 다시는 한 친구 와이프가 출산을 앞두고 학원에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외국계 회사라 그가 받는 연봉을 짐작하는 나로써는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돌아온 대답인 즉은 이렇다.
해마다 '당신은 X맨입니다'라고 날아오는 퇴직공지 팩스...
올해도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그 피말리는 경험을 한 친구의 와이프가 최소한의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려운 취직 결정을 한 것이다.
얼마전 결혼후 재취업한 어떤 주부의 삶을 TV로 보고는
죽어도 저렇게는 못살겠다고 그날따라 살갑게 대하던 아내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내내 무겁다.

사실 어지간한 연봉으로는 애 둘 키우는 서울생활을 감당하기 힘들다.
특히나 조그만 기독교 IT 기업에서 특출날 것도 없는 웹기획일을 하는 나같은 사람이야 오죽할까.
30대 후반까지는 그래도 열정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가뭄속 논바닥처럼 열정조차 말라버린 30대 후반의 가장에게 대한민국은 '조금' 잔인한 나라이다.
아내가 일하러 가면 서원이는 유치원 종일반에 들어가야 할테고,
이제 막 3살이 된 두돐짜리 희원이는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할까?
요즘같이 매일 야근모든 회사생활 가운데 주 3일을 꼼짝없이 칼퇴근해야하게 생겼다.
과연 누가 애 낳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누리겠다는 젊은 부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맡긴 아이들이 언제 발가벗겨져 어린이집 문고리를 움켜쥐고 울게 될지 모르는데...

어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실제로 몸도 마음도 아팠지만)
오후 늦게 들어선 극장에서 무리지어 영화를 기다리는 중년의 아줌마들을 보았다.
얼마나 잘 살면 저런 여유를 흉내라고 내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지금의 계산으로서는 매우 매우 요원할 일일 뿐이다.

가진 자들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바지 내리기를 강요당했던 나훈아가 '꿈을 잃어버렸다'며 호텔문을 박차고 나가는데
상황도 심정도 틀리겠지만 왜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는지 나같은 평범한 30대 가장들은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허하라.
여유를 허하라.
풍족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라.
아빠가 열심히 일하면 아내와 아이들은 조금은 행복하게, 남이 보기에 너무 비루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하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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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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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아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말을 아낀다.
글도 나름대로의 최소한의 정제과정을 거치고 세상에 내보내기로 했다.
이 규칙이 또 다른 이유로 깨어질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말의 영향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예상보다, 기대보다, 우려보다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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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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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Pluto 2

습작 2006. 12. 21. 20:18
플루토 Pluto 2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서울문화사(만화)

'몬스터'로 유명한 우라사와 나오키가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을 다시 그린 작품이다. 만화를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몬스터'에서 받은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얼마나 기다린 작품인지 모른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출간되는 기다림이 이제 시작되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우리가 가진 '만화'에 대한 편견의 테두리에서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다.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기가 막히게 탄탄한 플롯과 탁월한 심리 묘사는 여느 소설작품의 수준을 오히려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상처받은 영혼들에 대한 해부도 같은 묘사들은 너무나 사실적이서 섬찟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실 '아톰'을 책으로 읽지는 않았기 때문에 원작을 재해석했다는 느낌을 크게 받지는 못하겠다. 단지 기존의 유명세만으로도 넘치는 작품을 자신의 시각으로 다시 얘기하겠다는 용기와 그것을 가능케 한 저자의 깊이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겨우 2권을 읽은 터라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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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가 온다.
사무실안으로 들려오는 빗소리가 아주 적당하게 부서지며 들려오고 있다.
비오는 날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이렇게 어울릴줄 미처 몰랐다.
평화롭고 아늑하다.

어떤 것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했다.
구본형씨가 자신의 삶에서 건지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로마의 전쟁영웅들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가며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오늘, 이 회사에서, 이 시간을 보내며 만들려고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다.
이룰 수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나는 부족하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가진 위험과 허망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나는 내 손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이 그에 합당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치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으면 하고
또 그보다도 간절하게 나 자신에게도 보람있는 일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너무 생각속에서만 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에 뿌리밖은 영성이라는 '다윗'에 관련된 유진 피터슨의 책 제목이 생각난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팠을때에는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기도하던 그는
자신의 아들이 죽자 곧 울음을 멈추고 옷을 갈아입고 성대한 왕의 식사를 한다.
어쩜 이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윗은 말한다.
이미 죽어버린 아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여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슬퍼해보았자 무엇하겠는가...
다윗의 이런 모습은 그의 평생에 훈련된 것일수도 있고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였다.
성경속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도 더...
그는 영적인 인물이었으나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내 하루가 의미있기를 바란다.
어떤 모양으로든 내가 흡족해하는 방식으로 이 하루를 보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탄탄히 뿌리박은 것이었으면 한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믿기 때문에...

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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