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서울 혹은 객지로 나가는 바람에 덩그라니 남겨진 이 친구는, 그러나 우리 모든 친구의 중심에 서 있다. 떨어져 산지 몇 년 되는 지금도 우리는 이 친구를 통해 다른 친구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부러워하고 슬퍼하고 때론 무관심해한다.

그런 친구가 토요일 밤, 호프집에서 뭐하냐고 전화가 왔다.
나는 좀처럼 이런 전화를 하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하면서 친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친구는 궁금해한다.

우리는 아직도 낫지 않은 친구 와이프의 임파선 결핵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째를 갖고 싶지만 아픈 와이프에게 차마 그런 욕심은 부릴 수 없다 한다.
연봉은 아직 3,000을 넘지 못하는데
고시공부를 하다가 통영으로 들어간 친구는 되려 벌이 훨씬 낫다고 한다.
게다가 학원까지 오픈하면 월 칠팔백은 된다나.
전화를 받는 나도 웬지 모를 섬짓함에 가볍게 몸을 떤다.
비교되고 도태되고 결국은 절망하지 않을까 해서.

얼마전 나와 동갑인 사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것도 본인이 아닌 작은아버지로부터.
내가 아이들을 둘 키울 동안 장가도 못간 큰 아들 때문에 어지간히 속을 끓이던 분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그 집 며느리 후보가 아나운서라며
꼭 그 사이트에 가서 (그 잘난) 미모를 확인하라는 어른의 말씀은 사실 조금 언쨚다.
평생 그 집 아들과 나는 비교당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쟁에서 내가 이겼지만 도대체 그게 무엇이던가.
50평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는데 팔아야 할지 고민된다는 작은 어머니의 성화나
나이 서른 중반을 막 넘어가는 동갑내기 사촌보다 두어살은 많다는 얘기에 분명히 무슨 흠이 있을거라며 보이지 않는 쌍심지를 올리는 여동생, 그리고 울얼마...
그러나 그들을 탓하기엔 나도 별 다른 인간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무덤속까지 비교하며 경쟁하고 우쭐대거나 낙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경쟁이 대학입시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는 줄 알았다.

아주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거, 이게 그런 비교와 경쟁을 통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소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한 대의 라디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진정한 삶을 가능케 하는 주파수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상의 자잘한 흥분과 짜증,
상대적으로 거대한 사회와 문화가 강요하는 평범한 주파수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그런 주파수.
그러나 친구의 전화 한통으로도 이런 메시지는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그리고 머리위에서 숫자와 부등호가 쉴새없이 오간다.
나는 쟤보다 나은가,
쟤는 왜 나보다 더 나은가,
삶의 청명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속물로 가득한 진짜 내가 살아나온다.

치열한 삶의 댓가로 얻어지는 숫자들이 왜 가치 없겠는가.
그렇다고 참되고 가치있는 삶의 빛이 바래란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나의 삶에 얼마나 떳떳하고 당당하냐 하는 것이겠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이 나만을 위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삶도 더 낫게 만들어주는가.
나만의 잣대로 나의 가치를 잴 줄 알고 그로 인한 자존감이 친구와의 단순비교를 단호하게 끊어버릴 수 있는가.

서른 여섯, 혹은 서른 일곱 (내 주민등록상의, 그러니까 사회상의 나이는 한살 적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면 동갑내기들은 이해할 것이다.
술 한잔 걸치지 않고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질펀하게 나눌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내가 게으르게 살지 않았나
오늘 반성해보아야겠다.
그리고 다음엔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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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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