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약속을 미리 한 것도 아니고 해서 간만에 회사 근처 공원을 찾았다.
약간 싸늘하긴 해도 겨울이 되면 아쉬울듯 해서였다.
다만 공원 안이라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컵라면과 김밥으로 떼울 셈으로 편의점엘 갔다.
그런데 사이클복을 유니폼으로 맞춘 한 무리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편의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편의점을 빠져나갔는데도 어떤 아저씨가 뜨거운 물을 점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수기 앞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서 다른 모든 사람의 물을 대신 받아주고 있었다.
어차피 두껑을 열어젖히고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 컵라면들이라 군말없이 뒤에 서 있는데,
이번에는 새로 들어온 아줌마가 유유히 컵라면을 열어젖히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 아저씨 옆에 끼어드는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 "저 아주머니, 제가 먼저 온 것 같은데요"라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다른 컵라면의 모든 물을 받고 나서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그냥 그 아주머니의 뜨거운 물을 받아버린다.
받는 김에 다 받지 순서가 뭔 대수냐는 듯 대놓고 투덜거리면서...
순간 열받아 꼭지가 돌아가는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내 옆에는 공원에서 읽으려고 들고온 성경책이 떡하니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곰곰히 생각해보며 글을 적고 있는데 딱히 분노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편의점의 뜨거운 물이 그새 바닥날리도 없고, 물을 붓는데 몇 분씩이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양해를 구하는 한마디만 했었었도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더 좋은 건 내가 먼저 양보를 하는 거겠지만... 글쎄... 그렇게까지 해야할 일이었을까?

나의 옹졸함도 문제지만 이 땅의 '배려없음'은 가끔씩 나를 절망케 한다.
분명 파란 불인데도 횡단보도를 가득 메운 채로 유유히 딴 곳을 바라보는 어떤 운전자들,
인도와 차선까지 메우고 이삿짐을 배달하는 아저씨들,
소량 계산대에 '대량'의 상품들을 당당하게 올려놓는 아줌마들,
좁은 버스 의자에서 어깨와 양 다리를 한껏 벌린채 그냥 잠들어버리는 어떤 취객,
그리고 그 버스안에서 음담패설을 떠나가라 읖조리며 스스로 흥에 겨운 한 무리의 50대 아저씨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이들을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양보가 생활이 되고 배려가 습관이 된 어떤 어떤 나라들을 언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뜨거운 물 한 그릇을 양보 못해 씩씩대던 내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무배려가 뿜어내는 독소들을 지혜롭게 매번 넘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독소들을 향기로 바꿔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
내가 할 자신도 없고 남에게 강요도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사회의 자화상을 나의 것으로 끌어안고 고민하고 실천해줄 그런 사람들이
어떤 정치도 종교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래도 아저씨한테 뭐라 한마디 못한게 여전히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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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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