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어...

습작 2008. 6. 19. 11:56
둘째 딸 희원이를 보면 열의 아홉은 남자애로 착각한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서운했지만 이제 우리 부부는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그건 자포자기나 체념이 아니라 우리만의 시각에 대한 비밀스러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니다.
그저 우리가 낳은 딸이기 때문에 더 할 나위 없이 이쁘고 사랑스럽고 애틋한 것이다.
오죽하면 '딸이라는 보증'만 있다면 셋째를 낳겠다는 말을 와이프가 서슴없이 내뱉겠는가.
(우리 시대에 아이 셋은 때로는 무모해보이까지 하니까)

그런데 이 딸도 20년 혹은 30년 후면 시집이란 걸 가겠지?
우리 부부는 종종 문을 열고 들어설 그 신랑(놈)의 얼굴이나 생김새를 연상해보곤 한다.
그리고 쟤는 당차니까 이승기나 비같은 애를 업어올거야라고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가
신정환이나 지상렬만 아니었으면 좋겠다(전적으로 내 편견에 기초한 기준이다)는 생각으로 마무리 짓는다.
아무튼 가슴 한켠이 짠해져온다.
단순히 사랑하는 아이를 누구에게 '보낸다'라는 기분 이상일 것이다.
임신, 탄생, 성장에 이르는 그 수많은 추억이 필름처럼 아스라히 스쳐 지나갈 것이다.
결혼을 앞둔 아이(그 때는 과년한 처자가 되어 있겠지만)의 방을 슬쩍 한번 열어다보고
평소에 마시지 않던 독한 술을 한잔 기울일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자마자 동지를 만난 기분이라는 아내의 심정은 또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음 한 마디일것이다.
'잘 살어...'

이 말은 그저 Good luck이나 God bless you, 혹은 Don't worry Be Happy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인생이란게 그리 녹록치 않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겪어온 뒤일 것이고,
그러한 삶의 굴곡을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음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딸의 첫 출발은 그저 기쁨, 축하, 행복이상의 많은 상념들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유전된다.
부분적으로 학습되기도 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딸의 삶도 조그마한 진로 변경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내가 오늘 최선을 다해 살고 행복해져야 딸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라 다짐을 해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하지 말라.
상상과 기대는 내 몫이니까.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성남자는 없다  (968) 2008.07.03
밖에서 열 수 없는 문  (768) 2008.06.20
이혼하세요?  (443) 2008.06.18
왜 글을 쓰고 싶냐구요?  (1157) 2008.04.19
세상 모든 것에 이름 지어주기  (798) 2008.04.19
Posted by 박요철
,

이혼하세요?

습작 2008. 6. 18. 17:44

이혼서류를 떼러 가정법원에 다녀왔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걸으면 행정법원, 고등법원 등이 모여 있는 법원청사의 기다란 담장을 만나게 된다. 그 담장의 중간 어디쯤엔가 난 쪽문을 타고 들어가자 이혼을 생각하며 걸어갔을 많은 부부 혹은 남편, 아내들이 생각하기엔 다소 낭만적인 돌밭길이 보인다. 빗물이 고인 길 틈틈이 양쪽으로 우거진 수풀이 흔들거리며 뜻하지 않은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등법원과 함께 신관 건물을 쓰는 가정법원 1층에 들어서면 맨 먼저 은행창구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난 문을 통해 들어가서야 흡사 구청 민원창구 같은 가정법원 창구가 나타났다. 평일 오후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순서,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이혼에 필요한 신청서 양식을 찾았다. 은행이나 동사무소처럼 양식만을 따로 모아둔 테이블엔 얼핏 봐도 20여 종의 서류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혼에 관련된 서류 양식은 두어 바퀴를 돌았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구 옆에 앉아계신 시민 자원봉사자를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민망해서 웬만하면 직접 필요서류를 찾아 바로 나오고 싶었는데 별수가 없다.

"저... 이혼서류를 찾고 있는데요..."
"협의이혼이신가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시원스레 대답하는 자원봉사 아주머니는 서류를 꺼내 들며 내게 물었다.
이미 인터넷에서 기본적인 조사를 하고 갔기 때문에 재판이혼과 협의이혼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네..."
말꼬리를 흐리는 내게 '젊은 사람이 왜 벌써 이혼을 할까'하는 근심 어린 눈빛이 따라붙었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낚아채듯 서류를 집어들고 나오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실제로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눈빛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최근 협의이혼 과정에 숙려기간이 법적인 의무사항으로 도입되고 양육의 책임에 관한 조건도 까다로워져서 이전보다는 이혼이 훨씬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긴 이전의 이혼절차를 보고 있노라면 '욱'하는 심정만으로도 충분히 쉽게 이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들을 동시에 느끼긴 또 얼마나 쉬운가를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떠난 후에는 어떤 법적인 유예조치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혼 과정은 수술실의 칼날처럼 차갑게 다가왔다. 뜨겁게 사랑하였지만, 그와 똑같은 강도로 차갑게 이혼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이혼율을 보자면 어쩌면 그 어려운 결정이 그렇게들 쉽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가다가도, 숱하게 겪어온 사람들과의 갈등을 생각해보건대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의 (풀지 못할) 갈등이라면 또 한 번 깊이 공감되기도 한다.

일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법원에 다녀왔고 이혼 서류도 떼어봤다.
머릿속에 무슨 프로그램처럼 이혼의 과정과 절차에 대한 지식도 적지 않게 쌓인 상태다.
그러나 이 일이 마무리 된다면 컴퓨터 포맷하듯이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다.
아직도 내게는 이혼이 '쿨'한 결정이기보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임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이혼통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총 이혼건수는 12만4600건으로 12만5000건 가량이었던 2006년보다 400건(-0.4%) 감소했다. /뉴시스, 2008-04-21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밖에서 열 수 없는 문  (768) 2008.06.20
잘 살어...  (289) 2008.06.19
왜 글을 쓰고 싶냐구요?  (1157) 2008.04.19
세상 모든 것에 이름 지어주기  (798) 2008.04.19
3. 두려움에 대하여  (334) 2008.04.17
Posted by 박요철
,

반말

완벽한 하루 2008. 6. 18. 11:46
나는 남에게 반말을 잘 못한다.
회사에서도 부하직원에 반말을 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이상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그 사람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존댓말은 그 사람과 거리를 만든다.
그것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그나저나 이전 회사의 홍기과장이 이제 친구 하자고 한다.
회사 상사였다가 친구가 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우쒸 갑자기 말을 어떻게 놓나.
고민되네 -_-;;;

'완벽한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지혜  (6) 2008.08.12
이직  (718) 2008.06.20
주어지는 것과 이뤄가는 것  (335) 2008.06.17
당신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245) 2008.04.30
진정한 망중한  (527) 2008.04.28
Posted by 박요철
,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주어지는 것과 이뤄가는 것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곤 한다.
슬픈 일이다.

주어지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이 땅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아들이 되는 것,
남편이 되는 것,
아빠가 되는 것,
그리고 또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성숙하여지는 것.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천만의 말씀이다.
좋은 아들, 좋은 아빠, 훌륭한 남편,
그리고 한 사람으로 온전하게 성숙해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귀기울이기 시작하는 때는
뭔가를 이루려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가 아닐까.
반대로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할 때 어쩌면 그 무언가는 스스로 세워져가고 이뤄져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은
이 두가지의 미묘한 줄다리기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리라.
11시 퇴근, 12시 취침, 6시 기상의 삶이 반복되어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뿌듯함이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

이제 곧 12시다.
자러가야겠다.

'완벽한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직  (718) 2008.06.20
반말  (387) 2008.06.18
당신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245) 2008.04.30
진정한 망중한  (527) 2008.04.28
카페라떼, 클라식 마일드를 돌려줘!  (760) 2008.04.25
Posted by 박요철
,
며칠 전 일찍 잠자리에 든 아이들을 뒤로 하고
간만에 아내와 망중한을 즐기던 참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아이들 사진 얘기를 하던 차에
그동안 모아둔 사진을 보여달라 했다.
찾아보니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사진이 보이질 않았다.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태연스레 안보인다고 얘기했다.
불과 얼마전에 외장하드디스크가 고장이 나서 포맷을 했던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런데 아내 낯빛이 달라졌다.
약간 톤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다그칠 때만 해도 티격태격 하다 말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장실을 갔다왔는데 분위기는 한층 악화일로에 있었다.
와이프가 이런 분위기로 화를 내는 경우는 일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다.
그러나 없는 사진을 내놓으라고 다그치자 나도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없는 걸 어쩌냐.
회사에 가서 그쪽 컴을 찾아보겠다.
그러나 아내는 벌써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어굴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혼 6년차이지만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한번 보았을까 말까다.
이거 좀 심각한데...

급기야 자리를 펴고 누은 내게 아내가 말했다.
'사진 못 찾으면 이혼할 각오해'
짧고 단호한 어조였다.
이 사람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저녁 먹을 때 생전 처음 일일 드라마 '미우나 고우나'에서 주인공들이 이혼을 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나 여전히 나도 화가 났다.
아이들 사진을 잊어먹었다고 이혼하자니... 어이가 없었다.
할테만 하라... 하면서도 등 뒤로 흐르는 한줄기 식은 땀.
정말 이 사람에게 아이들 사진이 그렇게 소중했단 말인가.

아내가 말을 이었다.
아이들 돌 사진 한번 제대로 찍어주지 못했는데
희원이가 막 태어나던 그 사진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데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었는데
그걸 당신이 잊어먹어.
그러고도 당신이 아빠야.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사진 찾아내
그러지 않으면 잘 생각 하지마.

아내는 그렇게 살가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나면 말을 아낀다.
감정을 조절할 줄 알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회복된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 '사진'이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지?
pc는 중고로 치워버린 상태고 자료를 다아두었던 외장하드는 고장이 나서 깨끗이 포맷한 상태다.
이를 어쩐다.
싱크대 옆에 목석처럼 눈물을 그렁거리며 지켜선 아내를 두고
원격접속을 통해 회사 컴에 연결했다.
그러다가 기적처럼 전혀 엉뚱한 폴더에서 잃어버렸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혼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한 영혼을 더할 수 없는 절망속으로 빠뜨릴 뻔 했다는 사실이,
그러나 나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날 온 몸을 하루 종일 두들겨 맞은 듯 뒤척이며 새벽잠이 들었고
다음날 지각했다.

소중한 것,
그것은 평상시에는 잘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아내만큼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가 왜 그토록 화를 내는지 이유를 몰랐고 그 화의 참된 의미도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정의 가장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중한 것은 소중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가 왔을 때 쉽게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로만 소중하다고 지껄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지켜주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잃어버릴 뻔 했다.
아이들의 빛나는 과거 모습들, 그리고 아내의 마음...
사진들은 이중 삼중으로 백업을 받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그날 밤 아내는 미안하다고, 잘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 어렵고 슬프다.

'완벽한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말  (387) 2008.06.18
주어지는 것과 이뤄가는 것  (335) 2008.06.17
진정한 망중한  (527) 2008.04.28
카페라떼, 클라식 마일드를 돌려줘!  (760) 2008.04.25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2595) 2008.04.23
Posted by 박요철
,